아랍어나 히브리어, 페르시아어에는 원칙적으로 교육을 위해 적는 모음부호가 있을 뿐, 일상적으로는 자음만 적어서 단어와 문장을 나타낸다고 한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도대체 이런 식으로 문자언어 생활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다음 예들을 생각해보니 과히 문제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러시아어 예시를 생각해보자. 러시아어 단어로 우유를 뜻하는 молоко 의 발음은 /멀라꼬/에 가깝다. 똑같은 철자일지라도 위치에 따라 강세에 가까운가 먼가에 의해 같은 모음자 о는 /어/ 로도, /아/로도, /오/로도 발음될 수 있다. 즉 단어 표기에 드러나지 않는 강세를 제대로 알아야만 이 단어를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처음엔 이게 무슨 괴상망측한 일인가 싶지만, 몇번 단어들을 자주 보면 나도 모르게 이 단어를 자연스럽게 /멀라꼬/라고 읽는다.


그런데 이걸 생각해 보자면 영어 단어의 발음은 더 최악이다. 영어 단어 material의 발음은 /머티어리얼/에 해당하는데 영어를 갓 배운 초급자에게는 도무지 material 이라는 단어로부터 /마테리알/이 아닌 /머티어리얼/이라는 발음을 표기로부터 유추할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 간혹 영어를 좀 배웠다는 사람들도 이 단어를 /매테리얼/같은 변종 발음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그만큼 영어 단어의 발음은 표기로부터 논리적으로 유추해내기가 굉장히 힘들다. 사실상 영어단어의 발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사전의 IPA 발음기호를 완전히 숙지하는 것으로 결국 "외워서 익숙해지는 것 뿐"이다. 단적인 예들은 정말 얼마든지 댈 수 있는데


- major는 /메이저/지만, majority는 /머저리티/

- sword는 /스워드/가 아닌 /소어드/

- parachute는 /패러슈트/


라는 것이다.


몇몇 영국 지명 이름을 읽어보자면, 이 괴리는 점점 커진다. 특히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축구 팬들이 오히려 이 괴리에 무심한(?) 편인데,


- Leicester City 는 /레스터 시티/

- Reading은 /레딩/

- Leominster는 /렘스터/

- Derby는 /다비/

- Salisbury는 /소즈베리/


이 분야의 최강은 Godmanchester 인데 /것멘체스터/일 것같은 이 도시의 원래 발음은 /검스터/였다고 하니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즉, 영어 단어의 발음은 사실 표기와는 큰 연관성이 없으며 영국 사람들이 해당 지명을 발음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그 단어에 대응되는 발음이 머릿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어서'일 뿐이다.


그런데 표기와 발음 사이의 괴리는 '온갖 발음을 친절하게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자칭 주장되는' 한국어라고 예외는 아니다. 독립문의 발음은 /동님문/인데 한국인들이 이 '자음 동화 현상'을 누군가가 가르친 덕에 이해하여 이렇게 발음하는 것이 결고 아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미국인들이 독립문을 /도크.리프.무운 (dock-leap-moon)/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라는 소리. 즉 소리나는 대로 적되 뜻을 밝혀 적는다는 한국어 표기법도 사실은 어찌보면 거짓말이나 다름 없는 셈. 결론적으로 표기가 온전하다고 해서 발음을 완벽히 유추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는 뜻.


그렇다면 마지막 문장의 '이(裏)'에 해당하는, 표기가 온전하지 않다면 발음을 완벽하게 유추할 수 없다는 말은 참일까? 난 이 명제가 완벽히 거짓이라는 예를 한국 유행어에서 찾았는데, 바로 다음 구절들이다.


-ㅇㄱㄹㅇㅂㅂㅂㄱ

- ㅃㅂㅋㅌ

- ㅇㅈㅇㅈㅇㅇㅈ


모음이 하나도 없는 글인데 완벽하게 각각


- 이거레알반박불가

- 빼박캔트

- 인정인정어인정


으로 읽히는 건 젊은 세대 사이에서 형성된 공통된 초성 자음 줄임말 규칙이 암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젊은 세대라면 (나를 포함하여) 자음만 적힌 단어를 보고 내용과 발음을 제대로 유추할 수 있다는, 어른들이 볼 때 실로 기막힌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규칙이 세대에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 언어는 모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어에서 1인칭 단수인 '나'는 من 인데 이건 자음 م(m), ن(n)이 연달아 있는 형태이다. 처음 페르시아어를 보는 사람은 이걸 /므느/라고 읽어야할 지 헛갈리겠지만, 이란 사람들은 어려움 없이 /만/ 이라고 읽는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가수 마크툽(Maktub)의 이름은 아랍어 단어 مکتوب(maktūb)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차례로 م(m), ک(k), ت(t), و(w), ب(b)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자 و가 장모음 /우/로 발음된다는 것을 안다한들 이 단어가 /마크툽/인지 /메크툽/인지 /모크툽/인지는 아랍어를 늘 써오던 사람들끼리만이 알 수 있던 일종의 약속같은 것이었을 테다. 고로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다는 사실은 전혀 불완전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언어가 홑소리와 닿소리를 가지고 있는 형태라서, 그리고 중점적으로 배우는 제1외국어인 영어가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알파벳 기반의 언어라서 이런 의아함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인들에게는 오히려 신경쓸만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ㅡ 왜냐하면 형성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발음과 글자 사이에는 그 어떠한 상관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요즘 심심풀이로 머리나 식힐겸 페르시아어 강의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이야기.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