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시흥집에 올라와 화성 8차 살인사건을 다루는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고 있는데 자꾸 집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금속성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뭔가 하고 문구멍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더니 세상에, 왠 벨벳 모자와 광택이 나는 보라색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어떤 사람과 전화를 하면서 우리집쪽에 설치된 소화전을 여닫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소화기를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지를 않나, 자꾸 금속성의 물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길래 예의주시하다가 조용히 경비실에 연락을 해서 확인을 부탁했다.


갑자기 자기 뜻대로 일이 안 풀리는가 싶었는지 이 청년이 갑자기 1층으로 내려간다. 이윽고 경비 아저씨가 올라오셨고, 그 이상한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하니 올라오는 길에 1층 복도에서 지나쳤다고 하셨다. 그 사람이 자꾸 소화전을 여닫으며 소화기를 낑낑대고 그랬다고 말씀드리자 경비 아저씨는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소화전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그 안에서 발견된 것은 다름 아닌 소주 3병이었다. 이게 뭔가 어안이벙벙해 있었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의문의 남성이 떡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놀라서 보고 있었는데, 내 뒤에 서 있던 어머니께서 "어머 너..."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이 웃긴 해프닝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핼러윈 주말을 즐기기 위해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앞집 아들내미는 벨벳 모자와 보라색 셔츠, 검은 바지로 마술사 복장을 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도저히 집에는 술병을 둘 상황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소화전에 있는 소화기를 빼두고 거기에 몰래 빼돌린 소주병을 거기에 두는 것이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경비실 아저씨는 학생에게 소주를 이런 소화전에 두는 건 문제가 되니까 싹 다 정리하라고 엄포를 놓으셨고, 우리 모자는 황당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술사 복장을 한 귀여운 우리 고등학생은 손을 모으고서 말하길, "저기 죄송한데요, 이거 저희 엄마한텐 비밀로 해 주세요."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사유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날 소화전에서 발견한 소주병을 보고 어떻게 고등학생 따위가 멍청하고 어리석게도 술을 마실 생각을 할 수 있는지 혀를 끌끌차다가 새삼 깨달은 것이, 사람은 절대로 객관적인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으며 지극히 주관적으로 하는데, 그 근거라는 게 대체로 자신의 경험과 확신에서 비롯된 도덕적 우위에서 도출되는 우쭐함이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앞 집 고등학생이 술이나 마시는 열등한 10대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고등학생 때 입에 소주나 맥주는 일절 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내게는 성찬식의 포도주 이외의 에탄올을 구강 내 점막에 접촉시킨다는 행위 자체가 불경하고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2019년의 나는 정신만 잘 차리면 소주 두세 병 정도는 입안에 털어넣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지금 내가 술을 마신다한들 고등학생 때의 나는 술 안마신 성수로 영원무궁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음주를 한 너희 고등학생들은 나의 과거에 비하자면 절제하지 못한 패배자들이며, 나중에 당당히 즐길 수 있는 것을 숨어서 취한 가련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입에서 터져나오는 온갖 비난은 이런 경험과 확신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판단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신경질적이다. 일단 자신의 경험과 확신에서 도덕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보편적이지 않다. 내 세계 안에서는 그런 근거로 남을 비난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사는 사회에서라면 애초에 씨알도 안 먹히는 중얼거림 정도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조차 감히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중고등학생이 특별한 날에 입에 술잔을 대는 것이 그리 용서받지 못할 대죄인가? 그런 비난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비난은 남을 판단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판단의 결과로서 온전히 의롭다 함을 스스로에게 수여하는 그 자기만족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을 판단한 잣대에 비춰봤을 때 자신이 옳고 우위에 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토록 맹렬하게 비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단횡단같이 우리가 사회적으로 흔히 경미하게 저지르는 잘못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처럼 관대할 수가 없다. 그것을 가지고 남을 비난하려고 한다면 나 또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본전 잃을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도덕책에서나 등장할 윤리에 대해서는 또 그렇게 비난을 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 번 있었는데, 예전 교회에 다니던 같은 나이 또래 남자 하나가 교회 내의 두 살 어린 여학생을 임신시킨 일이 있었다. 결국 그 둘은 사실을 실토했고, 그 사실을 안 우리 동기들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특히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 교회 청년부에서 자체적으로 징계를 하든지 해야 한다며 심히 분개해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나를 타이르시며 '네가 그렇게까지 심한 말로 비난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교회 어른들도 그냥 쉬쉬하며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 해 여름에 있었던 결혼식에 많은 교인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 불장난(?)의 결과물이 첫 돌을 맞이했을 때 교회의 담임목사도 이 철딱서니 없는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결국 어머니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세상에는 혼전순결을 지키는 사람이 소수이며, 그런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비난하든지, 혹은 내 근처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러한 윤리 위배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우위가 침해되지 않을 것이 자신의 경험과 확신에 근거하여 확실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비난을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개신교 목사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어 아래와 같이 예를 들 수 있겠다. 목사들은 흡연자와 애주가들을 아주 마음 놓고 비난한다. 자신이 절대로 죽어도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동성애자들을 아주 마음 놓고 비난한다. 자신이 절대로 다른 동성의 사람에게 애정을 느끼며 성관계를 가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천주교인들을 아주 마음 놓고 비난한다. 자신이 절대로 개신교의 교리를 버리고 교황 밑에서 순명을 약속할 리가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목사들의 지나온 삶에서 흡연과 음주를 했던 경험, 동성에게 이끌렸던 경험, 교황의 가르침에 탄복한 경험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단호하고 혹독하게 비난을 퍼붓지는 못할 것이다.일말의 연민과 이해, 포용력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봤을 때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깊이 묵상해 봤을 터. 그들은 자신들의 비난이 신의 가르침에 비추어보아 합당한 훈계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자기를 드높이기 위한 타인 비방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난이 무익하거나 금지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이처럼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쉽사리 '비난'이라는 강력한 대응책을 구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을 모두 깨뜨리지 않고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일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