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전자신문에 기고한 글 '[ET단상]코로나 시대의 연구'의 출판을 위해 작성했던 제출본입니다. 신문에 실린 기고문은 아래보다 좀 더 축약한 형태입니다. (https://www.etnews.com/20200512000200)


전쟁터가 따로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전화(戰火)에 휩싸인 2020년의 세계를 보며 절로 드는 생각이다. 세계에서 매일 몇 만명의 추가 확진자가 발생하고 사망자 수까지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운데 세계 경제가 휘청대고 있다. 세계 각국이 여러 대책을 마련하여 발표하고 있으나 별무신통(別無神通)한 상황을 보노라면 이 사태는 우리 사회의 가치와 발전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위력을 가진 것임에 틀림 없다. 3월 20일 미국의 국제 외교분야 전문지인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실린 석학들의 기고문이 이러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세계는 바야흐로 미국 중심의 초(超)세계화(hyperglobalization)에서 벗어나고 있다. 기고문에서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월트(Stephen Walt) 교수는 선전포고와도 같이 “코로나19는 덜 개방되고, 덜 번영하며, 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사회가 긴밀히 엮인 현대에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즉각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영향을 끼칠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과학기술인으로서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서게 될 코로나19 이후의 새 시대가 우리 R&D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 분석하고 그러한 변화에 맞대응하는 차원에서 어떠한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고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역량의 정체를 막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마땅한 일이다.


우선 연구 교류가 비대면방식으로도 훌륭하게 소화될 수 있게끔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학회를 통한 전통적인 대면방식의 학술 교류는 당분간 예전만큼의 위상을 되찾지 못할 것이며 반대로 온라인을 통한 국내 및 국제 화상회의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학과 연구소 및 공공기관들은 비대면방식의 상호 소통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웹 세미나 (webinar)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위축되는 국내외 인적 교류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연구 현장에 디지털 및 원격 생산 기술이 도입되어 공간적 제약이 없는 연구가 담보되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과학기술인들이 재택 근무를 통해 실험실 현장의 연구를 통제 및 진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보안과 네트워크의 문제로 인해 연구실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의 처리 및 소프트웨어 이용이 불가능하므로 재택 근무 방식으로는 생산성 유지 및 연구의 연속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클라우드 PC 서비스와 확장성 있는 소프트웨어 기술을 접목하여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연구 환경을 지향하는 체제 혁신이 필요하다.


더불어 이러한 기술 발전과 환경 구축을 통해 주52시간 근무제를 둘러싼 연구원 및 대학원생의 근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과학기술인의 근로에 대한 정의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실험실에 나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실험에 몰두하는 것은 더 이상 능사가 아닐 뿐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로 애초에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능률적인 연구 업무의 진행을 위해 R&D 연구 인력의 근로시간을 어떻게 조정하고 배분할 것인지, 그에 따른 보상과 처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생산성을 유지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한편 현재 코로나19로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서유럽과 북미를 비롯한 선진국과의 연구 교류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활발한 국제 교류 없이는 과학기술연구 발전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므로, 과학기술연구 정책과 방향이 국제정치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각국의 과학자들이 연결의 끈을 놓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탈(脫)세계화 사조에 따라 기후 문제와 같이 국제 공조가 필요한 연구 주제는 침체를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정부는 이에 대한 지원을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설령 코로나19 이후의 국제정치와 외교가 엄습해 오는 엄연한 현실인 세계 위기를 감추려 할 수도 있다해도, 그것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탐구해야만 훗날 코로나19 사태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이전과 같은 국제 공조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는 위기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비로소 우리 나라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하지만, 이 말은 역사를 써 온 승자들에게만 항상 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부와 과학기술인,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협력과 이해를 통해 새 시대에 걸맞는 연구 환경을 조성한다면 우리는 훗날 이 시기를 가리켜 한 발걸음 크게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준 시기였다고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arques)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El amor en los tiempos del cólera)』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비정상적인 끈질긴 사랑만큼이나 코로나 시대의 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과학기술인의 비상하고 끈기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