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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도 알고 있지만 나는 아버지의 아바타(Avatar)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와 나의 성격은 참으로 비슷하다. 단지 삶의 궤적이 많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다. 아버지의 어렸을 적 환경, 학업 성취도, 대학 입학 이후 20대에 택한 진로는 나의 그것들과는 무척 다르다. 나는 자유로운 가정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성공적으로 박사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는 가정의 자랑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서 대리 만족을 느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늘 혹은 영향력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던히도 내 나름대로 일을 꾸며왔고 생각을 확장시켜 보았다. 아버지의 생각은 구시대적이고 모순적이며 그의 태도는 불합리한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항변이 따라온 것은 덤이었다.
그러다가 서른 살이 된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해 운명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엇이냐. 내가 원하는 교수의 모습으로 연구를 학계에서 진행하는 것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학자가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야만' 가능한 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1차적으로 나는 미국인이 아니고, 2차적으로 나는 한국에서 학위를 했으며, 그리고 3차적으로 나는 놀라운 성과를 공개하는 데 실패했다. 놀랍게도 오늘 아버지는 그마저도 다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으셨다. 30여년 전에 이미 그와 같은 것을 일찌감치 경험하신 아버지는 당신의 성향과 모습을 구체적으로 빼닮아 놓은 아들이 이 시기에 그것을 대면(對面)하리라고 생각하신 듯 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젊은 나날을 반추하자면, 그는 훗날 삶으로 뼈저리게 경험한 그 인생의 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것에서 실패를 경험했기에 진실로 하고자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쟁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들이 설사 나중에 그 벽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자신과 같은 그런 안타까운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한계의 테두리 안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다 해낼 수 있는 터전을 이루려고 노력하셨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벽을 모르고 살았다. 무엇이든 내가 뜻하는대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래왔고, 그렇게 기도하며 내 종교를 합리화하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이 '내 덕이었다'라고 으스대며 말씀하시곤 했고 나는 그것을 '무임승차자의 뻐기는 소리'라며 너스레를 떨면서 기억 너머로 던져버리곤 했다. 그래왔는데, 이젠 높고 두터운 한계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도 '피할 수만 있다면 잔을 아들에게서 거두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처음에 내 논문이 Nature 자매지에 투고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아마 아버지도 귀가 솔깃하고 어쩌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생각해보면 그때 아버지는 '의외다'라는 반응을 보여 오히려 내가 의기양양하게 나섰던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복잡미묘한 벽에 부딪혀 버렸고, 결국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잊혀질 일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아버지는 내 좌절이나 낙담에 대해 과히 슬퍼하지 않으시기에 무척 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곧 태생적으로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씀해 주신 것이다. 예전같으면 그런 게 어딨냐고 항변했을 테지만 이제는 수긍이 간다.
내가 벽을 만났을 때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던가. 생각해보건대 내 삶의 결과물이 타인들의 바람 ㅡ 특히 아버지의 자랑 ㅡ 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어떻게하나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모양이다. 내 논문은 왜 늦게 나오지, 이러면 남들이 잘 알아주지 못할텐데. 포닥은 어디서 할 수 있으려나, 나중에 임용에 유리하려면 좋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내가 속한 연구 분야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특출난 성과를 내지 않고는 주목받기가 힘든데. 그러다보니 나는 내 삶의 작은 결과물들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데 익숙해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모든 것들이 거품이었노라고 선언하셨다. 서울대 박사 타이틀로 그런 성과들을 뽑아 내며 나중에 네가 원하는 교수가 되는 것은 거품 속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기분 나쁠 말이었지만, 그런데 다시 곱씹어보니 틀린 소리도 아니다. 운명적이게도 나는 유수의 대학에서 교원 자리을 꿰찰만한 실력과 성과물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나는 그렇노라고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걸며 살아왔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한 번 해볼때까지 해봐라,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닐테니' 라며 방임해 두셨다. 그리고 이제 말씀하신다. "그래, 그게 호기롭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 말은 나를 가장 자랑스럽게 치켜세우던 아버지야말로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든 오히려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는 말이다. 결론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꼭 대학에서 교수직을 하며 살아야만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무던히도 스스로를 세뇌시켰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 가족의 바람이며 특히 아버지께서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 여러가지 일들 중에 하나일 뿐, 오히려 첨언하자면 아버지는 학자의 지위를 경멸적으로 바라보시는 분이기까지 했다. 그런 목적이 산산조각 부서지자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고뇌하지 못했던 '어떻게 살아가야 내게 주어진 능력들을 최대한 발휘하며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리 속에 콕 박히게 되었다. 이제껏 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가 되어야 해'라고 못박아 두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그 외에도 길은 많아'라고 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무심하게 지켜봐 줄 아버지가 계시다. 그 무심하다는 것이 오히려 큰 위로가 되고 '남들의 평가'에 질식해 죽는 내게서 두려움을 걷어내 주신다.
박사과정을 마치는 이 마지막 학기에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한다. 사실 아버지의 보이스톡 이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와 관련한 주제로 내적으로 많은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웠던 바가 있었다. 이제껏 박사학위 중에 배운 것이 많았지만 그 배움의 결론은 '쌓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나는 오늘 위태롭게 끝까지 잡고 있던 꿈을 버렸다. 불행할 줄 알았는데 퍽이나 편하고, 또 해방된 느낌이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성경적이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원래 내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I always cheer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