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물안전관리법에 따르면, 실험실에 있는 각종 화학물질 용량의 총합은 일정량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이 법에 대해 무지했는데, 최근 연구원을 휩쓴 위험물관리법 적용 광풍(?)에 나도 휘말리게 되었고, 덕분에 관련된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온갖 규제가 얼마나 많은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는데, 연구원 내 안전을 위한 것이기에 뭐라 덧붙일 말은 없었다. 이 제한 조치들 때문에 자유롭게 화학물질들을 보관 및 취급할 수 없게 되어 귀찮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규칙들을 안 지켰다가 사고라도 나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하면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위험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관리하는 국가기술자격도 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연구원에 소속되어야 있어야 관리감독을 더 철저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화학물질들이 있지만, 그 모든 물질들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물질은 극히 위험할 수도 있고, 다른 측면에서는 위험성이 덜하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특히 위험물안전관리법은 소방청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법령인지라 위험물 분류의 기준은 화재 가능성에 달려있다. 연구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외부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정말 국내 각 연구소 및 대학 실험실은 폭발성 화재가 크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성을 충분히 지닌 곳들이다. 수많은 유기용매와 인화성 물질들이 보관되어 있다보니 무슨 사고가 발생해도 딱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고가 흔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생각보다 다들 자신들의 방식으로 잘 관리하고 있기에 위험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능성이 0인 것은 아니므로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위험물안전관리법에서 지정한 위험물은 대략 3200종 정도 된다. 이 정보는 소방청의 국가위험물통합정보시스템(https://hazmat.nfa.go.kr)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건별 검색을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마침 문의를 해보니 전체 데이터베이스는 공공데이터포털(https://www.data.go.kr)에서 오픈 API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로 공개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전체 정보를 XML 형태로 내려받은 뒤 이를 엑셀로 가져 와 표 형태로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행정팀 안전관리담당자 선생님이 하트를 연발하시며 너무 기뻐하셨다. 귀인이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니라면서...) 


마침 우리 연구실은 내가 제작한 스프레드시트 파일을 통해 실험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500종 이상의 모든 화학 물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는 CAS 번호는 물론 용량까지도 기록해 둔 바 있었다. 사실 처음에 이 시약목록 파일을 제작할 때에는 '이렇게까지 다양한 내용을 적게 하는 게 괜히 학생들만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위험물안전관리법 문제가 불거지면서 실험실에서 보유한 위험물의 총량을 계산해야하는 상황이 닥치자 너무나도 유용한 것이 되었다. vlookup과 sumifs 함수만이라도 제대로 쓸 줄 알면 간단하지만 꽤나 막강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 (본래 MS 액세스를 이용해서 만들려고 했지만, 연구원 내 파일 공유의 문제도 있고, 당장 대부분의 사람들이 액세스를 다룰 줄 몰라서 그냥 엑셀로 만든 것이긴 했다.) 아무튼 현재 보유하고 있는 화학 물질의 위험물 여부를 전부 확인할 수 있었고, 이들 물질들의 총합 역시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위험물안전관리법에 따르면 연구실에서 보유하고 있는 위험물은 종류에 따라 지정수량이 있는데, 종류마다 지정수량 이하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종류별 지정수량 대비 상대값을 구한 뒤 이들을 모두 더했을 때 1이 넘어서는 안 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염소산염류의 지정수량은 50 kg이고 알코올류의 지정수량은 400 L인데, 실험실에 염소산염류를 10 kg 가지고 있다면(=0.2), 알코올류는 최대 320 L(=0.8)까지만 보유할 수 있는 식이다. 불행히도, 전북특별자치도 조례에 따르면 모든 실험실이 완벽한 안전장치를 갖춘 곳은 아닌지라 우리 연구원을 포함한 다수 연구실의 위험물 보유량은 지정수량의 1/5 이하로 더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각 실험실당 보유 위험물의 총량이 지정수량 대비 0.2를 넘지 않게끔 여러 위험물들을 사전에 지정된 옥외저장고에 보관하거나 폐기하는 것! 


다행히도 우리 연구실의 많은 연구원들이 자발적으로 합심해서 이 모든 일을 잘 진행시켜 주었다. 내가 데이터와 수식을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보조했고, 학생들과 인턴 및 포닥 연구원들은 시약목록 파일을 업데이트함과 동시에, 과도하게 보유하고 있던 위험물들을 필요성 여부를 따진 뒤 폐기하였다. 덕분에 현재는 각 실험실이 모두 지정수량의 0.18배 정도 이하의 위험물만 보유한, 상대적으로 관리된 상태가 되었다. 


제대로 일하려면 알아야 할 것도 많고, 극복해야 할 규제도 많다. 물론 자리에 앉아서 불평불만 늘어놓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지만, 이런 법령이 제정된 것은 다 그럴만한 사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ㅡ 악법도 법이다!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 모든 규제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보면 그간 시약목록 파일을 만들고 관리하고 업데이트하느라 고생했던 것이 헛짓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꽤나 뿌듯했다. 


아울러 협조한 우리 연구실의 모든 연구원들에게도 너무나 고마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