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오랜만에 사극을 집에서 TV로 봤다. KBS1에서 방영하는 송일국 주연의 '장영실'인데 생각보다 드라마의 품질이 너무나도 높아 깜짝 놀랐다. 그간 사극을 안 본지 오래되었는지 내가 감을 못 잡는 것 아닌가 싶은데 단순히 HD 화질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에 투박한 것이 전혀 없어서 이게 퓨전 사극 아닌가 하는 의문이 오히려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느낌을 주는 요인 하나 더. 대사 중에 과학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궁중 암투와 신파로 점철된 과거의 몇몇 사극들과 비교해보면 오그라들 정도로 작중 인물들의 대화 중에 '역사 및 과학' 정보들이 가득 들어가 있다. 오늘자 내용만 보더라도 피휘(避諱)와 세차(歲差) 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몇 번이고 나왔다.


그동안 조선 사회를 그려낸 사극들이 분명 시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배경은 죄다 서인 집권 이후 교조화된 성리학 기반 사회로 변해버린 조선 후기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었지만, 이 사극은 (아직은 첫인상일 뿐이겠지만) 조선 전기의 모습을 조금 색다르게 풀어내고 있는듯 하다. 특히 한복. 복식이 너무 과하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조선 후기의 것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름 잘 고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 앞으로 드라마가 그려내는 장면들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다른 캐스팅은 오늘 보고 엄지 손가락을 척 치켜 올렸는데 ㅡ 김영철이 태종이라니! 이런 신의 한수를. 그리고 이지훈은 이런 역할 좀 식상하지만 여전히 잘 어울린다. ㅡ, 장영실 역에 송일국과 같은 거물(?)이 과연 어울릴 것인가 아직도 의구심이 가시진 않았지만, 과학자라면 꼭 약간은 유약하면서도 강단 있는 똘똘이여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관복을 입고 측정하는 나중 이야기의 모습을 좀 상상해 보았다. 오늘 장영실이 산을 내달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철인3종경기도 거뜬히 해내는 삼둥이 아빠니까 찍는 데 어려움은 없었겠구만,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장영실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요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 나라 전통 자연과학의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모두 망실(忘失)해버린 요즘 시대에 분명히 이 사극을 보며 '우리 나라가 정말 그랬어?' 라고 놀라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사실 좀 안타깝다. 뭐 나라고 잘 알겠냐만 그래도 과학과 역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결코 우리 선조들이 격물(格物)에 뒤쳐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잡학(雜學)이 덜 차별던 관학파들의 시기였던 조선 전기의 분위기는 유학(儒學)만이 으뜸이었던 조선 후기와는 달랐기에, 실학(實學)이 등장하기도 수백년 전 우리도 많은 것들을 해냈던 시기였다. 그 시기의 정점에 바로 세종과 장영실이 있었던 것이 조선 역사의 큰 행운이었고. 그러니 이 사극의 교육적 효과는 결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계급을 뛰어넘어 조정의 부름을 받아 봉직한 장영실의 활약상이 사뭇 부러워보이는 것은 그가 곧 자본이 구축한 새로운 의미의 공고한 계급 구조 하에서 꿈을 잃어버린, 민주주의가 확립된 600여년이나 지난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환상이자 우상이기 때문이다. 관노의 자식임에도 하늘을 바라 보며 별을 관찰하던 장영실과 달리, 우리들은 그야말로 (중의적인 표현으로)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 되지 않았는가. 실력이 있으면 대접받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가 아니라 15세기 초중반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짐짓 음울하게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그나저나, 장영실은 여러 과학 측정 및 응용 기구를 잘 만들었던 손재주 있던 사람 아니었나. 내용이 너무 천문학으로 가는 것만 같긴 한데 좀 지켜봐야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