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에서 진행하는 연구과제의 사업계획서를 수정한 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의 시스템에 업로드 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업로드 그까짓 거... 하면서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이럴수가, 뭐 그렇게 할 것이 많던지. 이것은 단순한 '업로드(upload)'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전산화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편의 중 하나는 바로 다양한 형태의 문서를 고통스러운 수작업 없이도 손쉽게 대량으로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등본이나 각종 관리대장 등의 기록물을 출력할 때에 필요한 것은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데이터베이스 레코드면 충분하다. 이 칸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고, 저 칸에는 내 생년월일이 들어가고... 일종의 틀이 만들어져 있어서 데이터베이스에서 내 정보를 불러오기만 하면 자동으로 모든 칸이나 표에 관련 사항들이 자동입력되고, 이제 나는 출력 버튼만 클릭하면 바로 완벽한 양식을 갖춘 문서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연구과제의 업로드는 이런 꿈같은 상황과는 전혀 다른, 일종의 더러운 악몽이다. 먼저 우리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 게다가 이것은 MS word 가 아니라 한글이다!! 한글!! ― 를 통해 백 페이지는 족히 넘는 연구계획서를 서식에 맞추어(?) 자유롭게(?) 작성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이 파일을 올리는데, 불행히도 내가 한글 파일에 작성한 정보는 자동으로 웹에 입력되지 못한다. 웹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은 워드프로세서의 한글과는 사뭇 다르며 상호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낑낑대며 한글 파일에 기록했던 모든 정보를 다시 배열 및 조합하여 웹에서 요구하는 양식에 끼워넣어야 한다 ― 이 때 자동입력이란 없다. 심지어 한글 파일에서는 요구하지도 않았던 정보를 추가적으로 입력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것이 어제와 오늘 내가 (이젠 구닥다리라고 쓰지도 않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을 붙잡고 씨름한 내용이다. 단순히 업로드만 하면 되는 줄 알고 한글 파일을 첨부하여 저장 버튼을 누르고 업로드를 실행했을 때 마치 밀물처럼 몰려오는 오류 메시지들. 족히 100개가 넘는 느낌표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그저 망연자실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웹에서 모든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게 하고 '내보내기' 버튼을 눌러 연구계획서를 자동 생성하게 하면 되는 거였잖아! 왜 며칠간 고생을 시키더니 이젠 또다른 차원에서 고생을 시키려 드는 것이야!' 하는 짜증과 함께 '내가 이러려고 연구원이 되었나'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다년간의 대학원 생활동안 익힌 전산화와 양식 맞추기, 그리고 단순 정보 입력 노하우가 어디 가지는 않은 덕분인지, 이튿날이 지나기도 전에 이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고 아무 오류 메시지 없이 업로드를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모든 것이 전산화되면서 방대한 자료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빠른 시일 내에 작성할 수 있었다. 일일이 이것을 인쇄할 필요도, 오류가 없나 육안으로 거듭 읽으면서 수정본을 거듭 인쇄할 수고도 없었다. 게다가 클릭 한 번이면 몇 초도 안 되어 수백 페이지의 자료가 상대방에게 전달되니 피드백도 빠르게 받을 수 있었다. 효율이 완전히 늘었고, 일은 굉장히 빠르게 마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효율이 좋아진만큼, 일의 처리 속도가 빨라진 만큼,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은 굉장히 늘었다. 20년전 우리 선배들이 이렇게 웹사이트 앞에 죽치고 앉아 각종 연구원들의 학위 정보와 출신 학교 이름, 참여하고 있는 연구 과제의 개수와 참여율을 일일이 타이핑하고 있었을까? 아니, 일단 자료의 양이 지금처럼 방대해질 수 있는 구조이긴 했나? 벌써 이 과정동안 이메일이 몇십통이 오갔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이 굉장히 어렵게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다음 세대인 우리가 고도의 전산화 덕분에 비교적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편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정보의 양은 굉장히 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뭐 그 덕분에 우리가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발전한 기술을 소화하며 살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갑자기 최근 읽고 있는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의 구절들이 생각나서 한 번 써 보았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