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의 저명한 문학가인 도스토옙스키(Достоевский)의 소설인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과 톨스토이(Толстой)의 《부활(Воскресение)》을 읽었다. 이 정도 분량의 소설을 읽은 것이 아마 꽤 예전에 읽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이후 오랜만인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학부 시절에 읽었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이후 정말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다시 손 안에 집어들은 셈인데, 《죄와 벌》을 읽노라니 왠지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읽을 때 들었던 느낌이 십수년 만에 부활한 것 같은 그런 기분마저 들었다.


이 방대한 두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요약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라 한 번 갓 읽고나서 이 문학작품들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하기에도 모자람이 너무 많아서 감히 그 소감을 여기에 주절주절 써내려갈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대략 이러한 것을 느꼈다. 도스토옙스키는 10분의 시간동안 일어난 서사만으로도 책을 한 권 능히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듯 했는데, 이는 그의 서술 대부분이 등장 인물들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그의 심리와 행동들을 묘사하는 데 굉장한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는 전혀 닮지도 않았고, 그의 사상에 전혀 공감하는 바도 없으나, 소설가는 나로 하여금 자꾸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파묻히게끔 강하는 것 같았고,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세계에서 떠도는 망령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그의 서서사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이에 반해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인 네흘류도프를 둘러싼 서사는 사회주의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비탄에 처한 러시아 민중의 착취에 공감해야 한다는 사명감같은 게 느껴졌고, 중간에는 왜 톨스토이가 이 소설로 인해 러시아 정교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 조치를 받았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물론 《부활》의 최종 결말에 이르게 되면 성서는 다시 치유의 텍스트로서 다시 등장하게 되지만 말이다. 아무튼 톨스토이의 소설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지독한 심리 묘사의 비중이 다소 줄어 있기에 읽는 데 부담은 덜하긴 했다.


공교롭게도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강력하게 부정한 '부정한 사회가 인간 사회 악의 원인이다.'라는 명제를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옹호하는 인상을 주었기에 두 책을 연달아 읽은 나로서는 신선한 대비(對比)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인상도 비슷한 듯 완전히 달랐다. 도스토옙스키는 원한다면 사제가 되었을 법하고, 이에 반해 톨스토이는 이신론적 종교학자까지는 허용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서의 말씀이 소설을 관통하는 방식을 보노라니 결국 러시아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문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금방 이해되었다.


그렇기에 이를 짧게 정리하자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기독교 심리학자가 쓴 드라마, 톨스토이의 소설은 진보적 사회학자가 쓴 해설서. 이게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결코 아니겠지만, 나는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두 소설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이미 올해 '한 해에 읽은 소설' 편수로는 20대 이후 최대치를 찍을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생각보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여 놀라웠다. 특히 이들 문학작품을 통해 서사의 전달을 뛰어넘어 등장 인물들의 심리, 사회의 모습, 기독교 정신과 같은 다채로운 문화적 단면들을 한꺼번에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어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것들이 유명한 고전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겠지? 어제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L'etranger》을 샀다. 이 소설의 길이는 짧으니까 5월이 지나가기 전에 읽어보고 톨스토이의 다른 소설을 하나 사서 읽어볼 생각이다. 이런 게 독서의 즐거움이구나 싶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