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교황, 1333년에 고려 충숙왕에게 서한 보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9/28/0200000000AKR20160928186200005.HTML)금속활자의 역사를 쫓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들이 바티칸 서고에서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국왕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양피지에 적힌 필사 내용은 7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존이 잘 되어 있는데 해당 내용에는 ''왕께서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잘 대해준다고 하니 기쁘다'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물론 남북국 시대에 신라의 도읍이었던 금성에 페르시아와의 교역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있다고 하니 고대 및 중세 한반도와 근동 및 유럽간의 교류는 새삼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측에 종군 사제로 왔던 스페인 예수회의 가톨릭 신부가 한반도 땅을 밟은 것이 우리 땅과 기독교의 첫 만남의 순간이라고 늘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보다 무려 260여년이나 앞당겨진 시점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말하는 요한 22세의 글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고려 시대에도 벽란도를 통해 수도 개성에는 온갖 이방인들이 드나들며 교류를 했다고 배워왔다. 특히 고려 가요 '쌍화점(雙花店)'에 나오는 회회(回回)아비는 무슬림을 뜻하는 것일 정도로 당시 아라비아에서 온 무슬림들은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끼쳤고, 특히 중국 원(元) 왕조에는 제 2계층인 색목인(色目人)으로서 주요 지배계층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그러니 고려에도 당연히 중앙아시아, 근동,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유럽의 문화가 소개되었을 것이고 그 중에는 기독교 역시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 또한 있다. 비록 사제나 수도회가 고려로 선교를 온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기록에는 남지 않은, 그리고 훗날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 동화되어 흔적이 사라져 버린 그리스도교인 무리가 고려에 자리잡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외국인 집단인지 혹은 한국 토착민과의 혼합 집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14세기 한반도에 기독교인이 있었다니! 올해 들은 소식들 중 두 번째로 가장 미스터리하고 신기한 뉴스다.


이쯤되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일원으로서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인격적 어머니 마리아에게 붙인 칭호)라는 명제를 거부한 네스토리오스(Νεστόριος)의 신학을 따른 아시리아 동방교회, 혹은 경교(景敎)가 언제 한반도에 전래되었는지를 결정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자료를 혹여나 찾게 되지 않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유적과 기록이 증명하듯 중국 당(唐) 왕조 시절 대진사(大秦寺)라는 이름으로 네스토리오스파 교회가 중국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발해와 신라로 당시 중국에서 흥왕하던 경교가 소개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물론 너무 예전 일이라 기록과 흔적도 찾기 힘들겠지만, 1333년에 요한 22세가 고려에 친서를 보낸 사실을 이제서야 찾은 것을 보면, 경교의 흔적을 찾는 것 역시도 어렵지만 완전 불가능한 요원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유적과 기록이 증명하듯 중국 당(唐) 왕조 시절 대진사(大秦寺)라는 이름으로 네스토리오스파 교회가 중국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북국(발해)와 남국(신라)으로 당시 흥왕하던 경교가 소개되지 않았을리 없을 것이다. 물론 너무 예전 일이라 기록과 흔적도 찾기 힘들겠지만, 1333년에 요한 22세가 고려에 친서를 보낸 사실을 이제서야 찾은 것을 보면, 경교의 흔적을 찾는 것 역시도 어렵지만 완전 불가능한 요원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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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