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이 때에 나는 서울 생활을 끝마치고 안양으로 돌아왔다.일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가 하면, 지난주 제주 여행(7.22~24) 중 내가 살고 있던 서울 원룸을 8월부터 넘겨받을 사람이 운좋게 때마침 나타나 월세 계약을 성사시킨 덕에 나는 서울 집을 빼서 안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바라셨던 것이 8월이 되기 전에 내가 안양 할머니댁으로 돌아와서 모든 짐들을 정리하고 미국 출국을 같이 맘편히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극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이주하는 날짜는 7월 30일으로 잠정 확정한 상태였고, 짐은 이틀전부터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룸으로 이사할 때 분명히 박스 5개에 내 모든 짐을 다 담을 수 있었건만, 원룸으로부터 나올 때에는 짐의 양이 내 예상을 너끈히 초과하더란다. 중형 박스 10개도 모자랐는데, 짐들이 분열하여 양을 자가 증식시킨 게 아닐진대 결국 6개월 정도 살면서 이것저것 구매하고 쌓아두기 시작한 물건들이 이렇게나 많이 누적된 것이리라. 택배로 모든 짐을 안양 집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는 내 호기로운 계획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시쳇말로 멘붕에 이른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고, 용달 트럭을 하나 호출하여 깨끗하게 매듭짓기로 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아시는 분이 급히 트럭을 몰고 와 주셨고, 30일 정오 즈음에 도착한 차에 모든 짐과 내 몸을 싣고나서야 텅텅 빈 서울 대학동 원룸과 작별할 수 있었다.


2월부터 7월까지 고작 대여섯달 정도의 짧은 원룸생활이었지만 잊지 못할 인생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걱정과 좌절로 시작된 원룸 생활은 3월에 포닥 인터뷰 이후부터 극적으로 바뀌었고, 나는 미국행을 결정지은 상태로 안양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원룸 생활을 하면서 주부들의 고충과 서울에 사는 또래 친구들의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독립된 시공간에서의 삶을 통해 소소한 생활력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었다. 진정한 독립은 귀국하고나서부터겠지만, 짧은 원룸 생활을 통해 충분히 독립생활을 맛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덩달아 서울대에서의 후반부 포닥 생활도 참 즐거웠다. 스페인어 시험인 DELE를 성실하게 준비할 수 있었고, 집 근처 Fitness FM 에서 PT를 받으며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체격과 체력이 예전에 비해 무척 좋아졌다. 논문도 두어편이 나왔고 연구과제도 적절한 수준에서 마무리되었으며, 내가 서울대에 있으면서 매듭지은 모든 연구결과가 논문의 형태로 마무리되었으니 이쯤되면 꽤 성공적인 포닥생활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미국 포닥행이 결정된 게 가장 큰 수확이겠지만.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 만감이 교차했다. 독일에 다녀오는 한 주를 제외하면 약 2주간 여기에서 지내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물로 미국에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닌 이상 그리 호들갑 떠는 감성에 젖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동네에서 새로운 생활을 충실하게 잘 준비해야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