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기묘하고 신기한 일이다. 세상일 돌아가는 방식이 어찌 이러한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지난 월요일. 미국 화학회에 다녀오신 교수님의 제안으로 미국에 있는 두 명의 principal investigator(PI: 과학연구과제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주로 대학 연구실이나 공립/사립 연구소의 장을 의미함.)에게 해외포닥 자리를 문의하게 되었다.


미국 포닥의 경우, 요즘 국내 박사들 사이에서는 연구재단이나 과제 연구비에서 지원을 받아 '재정 문제가 이미 해결된' 사람들만이 미국에 포닥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실제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PI에게 포닥 자리를 문의하는 메일을 보내면 '현재 지원해 줄 유효한 펀딩이 없다.' 혹은 '펠로우십에 추천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미국 PI라고해서 돈이 무한정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기왕이면 경쟁을 통해 연구를 위한 인건비를 지급받는 사람을 고용하면 자신의 연구실 지출도 상당부분 감소하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요즘은 대놓고 '자기 펀딩 없는 사람은 포닥으로 안 받음'이라는 공고를 웹사이트에 올려놓는 PI도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연구재단에서 해외 포닥 인건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에 엄청나게 많은 국내 박사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도 미국행을 거의 99% 포기했다. 나도 주로 미국에 있는 PI 들에게 이메일을 몇 번 보내봤지만 심지어 답장조차 없었다. 읽기는 한 건지... 물론 이해는 간다. 하루에 수백통의 이메일이 오갈텐데 어디 변방의 한국에서 웬 어린 박사가 보낸 이메일을 읽어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라도 있었겠느냐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일. 워낙 철벽같은 미국 PI들의 홀대에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고 해외 포닥을 할 수는 있을까 걱정도 참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님의 제안으로 두 명의 PI에게 사실상 '자포자기' 혹은 '안 될거야 아마'의 심정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명의 PI에게서 즉각적인 답장이 온 것이었다. 만 하루도 안 되어서 답장을 보낸 것. 나는 새벽에 잠깐 깼다가 이메일을 확인해보고 등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이게 정말 내가 받은 답장이 맞나? 게다가 답장 내용은 지극히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메일 마지막 문단에는 인터뷰를 하자는 말까지 쓰여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지? Skype를 하자고? 가만, 내 Skype 계정이 잘 돌아가고 있나? 프로필 사진은 어떻지? 내 집 컴퓨터에서 Skype 켜면 뒤 배경이 완전 별로 아닌가? 온갖 호들갑을 떨며 답장에 답장을 보냈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틀 뒤에 답변이 왔고, 결국 한국 시간으로 오늘 오후 9시에 Skype를 통해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주말이 되기 전인 금요일에 박사과정 동안 연구했던 모든 결과들을 파워포인트 파일로 만든뒤 pdf로 변환하여 메일에 첨부하여 전송했고, 그 파일을 두어번 정도 훑어 보면서 혹시 모를 짧은 연구 발표(short talk)를 준비했다. 인터뷰 즁에 어떤 질문을 내게 할까 예상 질문을 몇 개 뽑아서 답변도 연습해 보고, 내가 PI에게 할 질문 ― 사실 이게 더 중요했던 것 같다. ― 도 두어 개 미리 예상해 보았다.


대망의 인터뷰 날! 집에 조금 일찍 들어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컴퓨터를 켜서 Skype에 접속했다. 한 한시간 정도 기다리며 그 연구 그룹에서 발표된 논문도 읽고, 소개 영상 ― 이 영상을 보고 인터뷰에 들어간 것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과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반복해서 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무슨 말인지 모르고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적절히 반응하며 '나도 알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탐독(?)을 하다보니 인터뷰 15분 전.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금 긴장되었다. 솔직히 '영어'로 말한다는 것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단지 'job interview'라는 매우 생소한 것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속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반, 우려 반의 반이 통째로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시간 오후 9시! 한 3분 정도 뒤에 갑자기 익숙한 PI의 이름이 뜨며 영상 통화가 연결되었다. 아 시작이다.


약 43분 정도의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게중에 연구에 관련된 얘기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비록 내가 연구 관련 슬라이드와 내용들을 첨부해서 보내긴 했지만 해당 내용을 소개하거나 연구 계획을 이야기하는 소위 '과학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놀랍게도 이 PI는 연구소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과거, 그리고 연구 배경과 연구실 철학 등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덕분에 나도 마음은 좀 풀어졌고,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관련 내용들에 대해서 이것저것 얘기할 수 있었다. 이 사람 정말 괜찮은데? 그리고 인터뷰의 끝은 해피 엔딩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나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며 한두 주 정도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라고 했지만 자기는 내가 포닥을 오면 좋겠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 연구실의 포닥 자리를 제공 받았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조금 직접적으로 물어봤더니 '기꺼이'라며 I'd love to offer ~ 라고 말씀하신다. 오 세상에, 이 인터뷰 어디 '몰래 카메라' 혹은 가상 포닥 체험 프로그램 '우리 포닥됐어요' 이런 거 촬영하는 거 아니지?


끝까지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인터뷰에 임해주신 PI와의 영상 통화를 끝낸 뒤, 나는 혼란와 기쁨, 어색함과 약간의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마구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내 지금 지도교수님께 연락을 드려 상황을 설명해 드렸고, 내일 개별 미팅 약속을 잡았다. 바로 생각나는 것은 가족인데, 지금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려가며 샴페인 터뜨리면 나만 우스운 사람 될 수 있기에 일단 전화가 즉시 가능한 어머니에게만 이 상황을 설명해 드렸다.


아무튼,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그 어느때보다도 긍정적인 것은 맞다. 사람의 일이 이렇게 풀리리라고는, 혹은 이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내 뜻대로 세상 일을 움직여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나이 서른이 되고 보니 세상 일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을 요즘 피부로 느낀다. 모든 것이 확정되면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요소들이었고, 그것은 된다고 하면 감사하게 받아들일 것이며 안 된다고 하면 누굴 탓할 필요 없이 그대로 내려놓아야하는 것이었다. 만사가 이렇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콧대를 높이며 나잘났다고 으스댈 것이 아니라 더욱 낮게 겸손하고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이의 사고'에 비춰 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의 섭리'이다.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내 뜻이나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어째 거의 없다. 놀라운 경험이자 신묘한 지혜이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오늘부터는 좀더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모든 절차들을 밟아야겠다. 지금 기분은 뭐랄까... 예쁜 금붕어가 담긴 깨지기 쉬운 유리 어항을 들고 너무 부드러워 미끄러질 것만 같은 솜사탕 꽃길 위를 갑자기 걷게 된 느낌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