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KIST는 개원기념일 휴일을 설 연휴 앞 혹은 뒤에 붙여주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모두가 긴 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기 싫어 죽겠다고 아우성일 때 나는 여유롭게 커피를 한 잔 들이키며 시흥 부모님 댁에서 잠옷 바람으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물론 아침 내내 집에서 뒹군 것은 아니다. 오전 9시쯤에 단단히 무장을 한 채 최강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아침 공기를 뚫고 서울로 향했다. 우선 시청역 근처에 있는 찻집에 가서 잘못된 카드 결제 건을 취소해야 했는데, 정작 주인 아주머니는 카드결제기를 다루는 법을 모른다고 하시기에 내가 직접 카드 결제 건을 취소하고 그 금액만큼 새로 결제를 해서 문제를 말끔히 정리해 드렸다.


그리고 종로5가 시장에 있는 한복집에 들러 주인집 아주머니와 이것저것 재며 궁리한 끝에 보라색 실크 도포(道袍) 하나를 주문했다. 이번에는 겹이 아닌 홑으로 만들어 전보다는 조금 가볍게 봄이나 가을에도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로 말이다. 소창의(所氅衣)나 중치막(中致幕)도 같이 살까 하다가 이런 의복들은 차라리 조금 젊은 감성의 한복집에 가서 주문하는 편이 나을까 싶어서 도포만 하나 주문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광명역에 와서 어머니와 만난 뒤 커스텀멜로우 옷집에 들러 양복 치수를 늘릴 수 있는 지 알아보았다. 사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양복들 중 가장 최근에 산 1벌을 제외하면 전부 상의가 다 작아졌다. 7년 전 미네소타로 떠나기 전에는 상의 38 사이즈가 딱 맞았지만, 몸이 커진 덕분에 너무 딱 달라붙는 것이 누가 봐도 옹졸하게(?) 보이기 때문. 판매 직원도 38 사이즈 상의를 입은 나를 보더니 어휴 저건 이젠 입을 수 없고, 이제는 40 사이즈를 입으셔야 된다고 말했다. 하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체중이 65 kg 정도에 캐주얼 셔츠 사이즈는 95에서 갓 100으로 넘어갔지만, 지금은 체중이 70 kg 정도에 셔츠가 105는 되어야 입을 수 있지 않은가. 어쩐지, 40 사이즈를 입어보이 확실히 낫더라. 안타깝게도 이 정도 치수가 늘어나는 정도는 수선을 통해서 늘릴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 겨울은 다 지났으니 두어달 뒤에 여름용 양복을 사러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흥집에 가지고 온 양복들은 모두 매제에게 입혀봐서 사이즈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잘 맞으면 다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한복점과 양복점을 둘러보고 오니 참, 이 옷들은 자주 입는 옷들이 아니지만 왜 이렇게도 신경이 쓰이면서 좋은 것으로 고르고 싶은지... 그 감정을 나조차 이해 못하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한복점 사장님은 이렇게 젊은 사람이 한복을 좋아하고 입어준다고 하니 너무 고마워 하시더라만, 아무튼 예쁘게 한 벌 또 잘 뽑혀 나와서 다음에 나들이갈 때 한 번 입고 갔으면 좋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