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력(册曆)의 길흉신(吉凶神)에 따르면 음력 12월 19일인 오늘은 제사불의(諸事不宜), 즉 모든 일이 불리하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날이었다. 달에 한 번씩은 꼭 이런 글자가 쓰여있는데, 나야 이런 거 상관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을 하지만 옛날옛날 이 책력의 철학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은 이 핑계를 대고 웬만하면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옆 날짜들에 마땅히 하는 것이 좋다고 쓰인(宜) 일들을 보면 길흉신에 영향을 받는 일들이 참 많다 ㅡ 결혼, 병 치료, 상량(上梁)식, 제사, 친구들과 만나는 것 등등... 인생사의 많은 일들이 다 길흉신의 오묘한 순환과 조화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지만, 이러한 상식을 넘어선 초월적인 가치 ㅡ 혹자는 비상식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ㅡ 의 존재는 사람들의 사고와 결정의 밑바탕이 된다. 아니, 좀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핑곗거리가 된다: 왜 이날 결혼합니까? 이날이 길일(吉日)이라서요. 왜 원수의 잘못을 용서합니까? 예수님이 그리 말씀하셔서요. 전통적인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어떻게 성립된 것인지도 잘 모르는, 그래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리(公理)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그러니 책력에 쓰인 길흉신이 왜 그런지 적혀있는지, 또 무슨 기준으로 돌고도는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알아보겠다고 덤벼드는 것도 사실 무의미한 것이다 ㅡ 그냥 옛 사람은 이렇게 믿고 생활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비록 우리 조상들은 지금 판단 기준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기묘한 순환을 믿으며 지내왔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 사람들이 지금을 사는 사람들보다 영 손해를 보며 살았다든지 혹은 불행하게 살지는 않았으리라. 사실 지금을 사는 우리들 역시 우리의 판단을 기준으로 ㅡ 즉, 어떤 초월적인 사상 혹은 미신을 따르지 않고 ㅡ 내키는 대로 실행했다가 피보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책력에 적힌 바를 따르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조상들은 별다른 고민하지 않고 다 정해진대로 따라했을테니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이 이쯤 이르니 사실 우리도 21세기에는 새로운 개념의 책력이 일러주는 대로 생활하는 것 같다. 고도의 기술을 기반으로 계산된 결과를 우리는 매일같이 받아보며 인생의 일들을 선택하고 판단하니 말이다. 날씨가 이러하니 내일은 빨래를 돌려야겠구나. 주식 시황이 이렇다니 오늘은 기필코 손절매를 해야겠구나. 오늘은 알고리즘이 이런 영상을 추천하니 이걸 보면 되겠구나. 정보의 효율적 처리 측면에서 보면 종교나 전통이나 오컴의 면도날이나 빅데이터 기반 전산처리나 다 거기서 거기인 것 아닐까.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