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이번 연말 휴가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우리 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는 1985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광물자원공사(구 대한광업진흥공사)에서 근무하셨고 2019년의 마지막날인 어제 퇴직 기념 행사를 끝으로 직장에서 물러나셨다. 내가 1986년에 태어났으니 내가 살아온 날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몸담아 일해오셨던 것이다. 요즘같은 직장 및 사회 문화에 비춰보면 이런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까운 주변에서 만나보게 될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가 없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회사 월급이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아버지는 27살의 나이로 입사한 그 해 겨울에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셨고, 그 다음해에는 내가 태어났다. 신혼의 즐거움이나 가족 부양 자금의 축적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취업, 결혼, 육아를 연이어 감당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 집은 철산동에 있는 13평짜리 주공아파트 전세였다고 했다. 이 집이 내 기억에는 전혀 없지만, 아버지는 광명을 지나갈 때마다 그 얘기를 하곤 하셨다. 정말이지 지금 세대로서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무모한 사회 생활의 시작이었는데 ㅡ 심지어 나보다 한참 어렸을 때의 이야기인 것을! ㅡ 당시에는 아버지 혼자 회사에서 받아오는 월급만으로도 한 가정을 넉넉히 꾸려갈 수 있었던 모양인지, 혹은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가계 꾸림이 있었던 덕분인지 아무튼 나에 이어 동생까지 낳고서도 가정을 계속 유지시키셨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어쨌든 우리 아버지는 회사 월급을 받아가며 이 대단한 일을 해내신 것이었다. 혹자는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던 대한민국의 경제 덕택 아니냐고 그의 노력을 폄훼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80년대 및 90년대의 온갖 부조리한 직장 문화와 왜곡된 사회 윤리 속에서 주 6일간 뼈빠지게 일하며 이러한 열매를 쟁취해내셨다. 물론 2020년대의 그것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쉬웠니 어려웠니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그 시대에서 우리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여 가정을 이끌어 오신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일 아닌가?


그렇게 끊임없이 우리 가계에 수입원이 되어 준 회사를 아버지가 이제 떠나셨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면, 지난 삼십여년간 나는 아버지의 피부양자였지만, 이제 2020년부터는 아버지가 내 피부양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이 2020년은 아버지의 삶으로보나 내 삶으로보나 굉장히 뚜렷한 변곡점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해이다. 퇴직한 아버지.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들은 직장을 가지고 일하지 않으면 의기소침해 하고 남성성을 거세당한 것같은 그런 치욕스러움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부디 그런 마음 가지지 않고 인생의 새로운 파트를 잘 준비하고 즐기셨으면 좋겠다.


굳이 언급하자면, 아버지 회사는 썩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자원외교라는 이름 하에 큰 사업을 많이 벌이며 성장하던 아버지 회사는 그것들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굉장한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제는 회사의 해체와 흡수가 공공연히 언급될 정도로 큰 위기를 맞이했다. 우리 아버지도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오신 이후에는 이러한 상황에 큰 심적, 정신적 타격을 받으신 듯했으며, 자신들 세대의 방만과 탐욕, 그리고 실책으로 인해 후배 세대들이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며 굉장히 안타까워해 하셨다. (물론 우리 아버지야말로 그런 잘못된 흐름을 거역하려다 피해를 당한 경우이긴 하지만.) 부디 한국광물자원공사가 어려움을 딛고 성장한다는 좋은 소식을 기사나 다른 매체를 통해 언젠가는 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무튼 아버지는 우리 가정에 신화를 써내려간 분이시다. 내가 그분의 이야기를 여기서 그치지 않게 하고 더욱 더 꽃피우게 함으로써, 말년에는 그에게 자랑스런 아들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게 다름아닌 효일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