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흔히 축복송으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 주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은 관계에 큰 재앙이다. 왜냐하면 어떤 누군가는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것인데, 사람이 자신의 유한한 자원으로부터 사랑을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쏟아붓기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기비움(self-emptying)의 신적 사랑, 곧 아가페(αγαπη)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방향적인 숭고한 사랑, 곧 사랑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은 오직 전능한 신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서로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받고 싶다고 하기 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 사람은 굉장한 욕심쟁이이자 관심병자에 불과하다. 또한 사랑을 주는 내가 온전히 사랑을 받고 있는지 늘 확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으면 비워지게 되고 결국 상처입기 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 단적인 예가 있다 ㅡ 사랑이 어느 누구에게 기울어져 있다면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빚진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며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라고들 사람들이 말한다.


하지만 사랑은 정확한 계측이 어려운 성질의 것인데다가 사람마다 계량의 방식도 달라서 내가 생각하는 1 kg의 사랑이 과연 누군가에게 0.5 L의 사랑이 될 수 있는지 나만의 기준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각자가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인지, 지속가능하면서도 나날히 확장할 수 있는 것인지 탐색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것이 잘 맞아 떨어지면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면서 지낼 수 있으리라.


우리 사랑의 불행은 모두 이 계측에 실패하기 때문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계측을 위한 소통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서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 연인 사이의 관계 모두 그러하다. 심지어 이러한 사랑과는 결을 달리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면 소통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사랑할 사람이 주변에 널려 있고 심지어는 더 쉽게 소통도 할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해졌음에도 사랑의 소통은 오히려 줄고 있는 오늘날의 하루를 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다. 사랑은 참 좋은 것이기에.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