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읽은지 십수년이 지나긴 했지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역작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인류를 위한 동정으로 거짓 포장된 대심문관(大審問官)의 궤변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가 대심문관의 입술에 키스하는 장면이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이것이 인류를 향한 성자(聖子)의 불가해한 사랑의 표징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인간의 이성과 논리, 그리고 감정을 초월하는 바로 이 신적인 사랑을 흠숭(欽崇)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사실 이 사랑이 전제된다면, 과학이라는 좁은 분야를 제외하고는 우리 안에서 시비(是非)를 가릴 일이 없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은 좋고 저것도 좋고 그것은 조금 덜 좋은 것 뿐이다. 내가 옳니, 저들은 그르니 편을 가를 일이 없다. 물론 사람들은 이것이 천상 낙원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라고들 하겠지만,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다고 외치는 선견자들의 말을 곱씹어 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책무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랑을 근거로 하여 세상 일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라,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라. 죄 지은 자를 처벌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우라,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라. 옳은 것을 격려하라,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라.


최근 대한민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각종 정치 이슈와 성 담론을 들여다볼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이 극단적인 목소리들 가운데 상대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전제된 것이 있는가? 혐오에는 혐오로, 친일(親日)에는 종북(從北)으로 매도하는 이들의 함성 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가차없는 멸망의 예언 이전에 흘리는 예수의 뜨거운 눈물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는지. 그래, 거기서 주먹을 쥐고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은 아니겠지만, 대략 1/4은 교회의 문턱을 밟아본 사람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예측인데, 이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1고린 13:1)'라고 고백한 바울의 편짓글을 먼저 떠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상대방이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에 부합되지 못하므로 무정히 비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노라고 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바울의 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페 2:3)" 그러니 우리의 사유와 논변을 갈고 닦기 전에 서로 사랑해야겠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