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탄소학회 춘계학술대회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대구에서 있었다. 초청강연이 있어 어제 세션 마지막 즈음에 발표를 진행했는데, 원래는 30분 강연 예정이었으나 직전 발표의 문제(?)로 인해 3분 정도 깎아먹고 빠르게 시작해야 했다. 중간에 슬라이드에 포함시킨 이미지가 나오지 않은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기분 좋게도, 많은 분들의 호평을 받았다. 학술이사를 맡으신 박사님은 연신 '내가 정말 KIST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분이 맞는지'를 물어보며 놀라워하셨다. 학회 일정을 모두 마치고 강연자들과 정회원 이상 박사,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화여대에서 오신 교수님 한 분이 그렇게도 내 칭찬을 하시면서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며 입이 마르도록 찬탄해 하셨다. 여대에서 먹힐 강연이라나? 좌장을 맡았던 전남대 교수님은 무슨 설민석의 강의라도 듣은줄 알았다며 좌중을 돌아보니 모든 청중들이 아주 집중하고 있는 게 보여 깜짝 놀랐다고 하셨다. 센터장 박사님도 김박사가 도대체 얼마나 잘했기에 곳곳마다 톡을 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느냐며 재밌어 하셨다. 내 강연을 처음 들어본 KIST 센터 학생연구원들 중 하나도 오늘 아침에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신선한 방식의 강연이었다며 너무 좋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학술대회 발표를 할 때 흔히 논문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서론 - 실험방법 - 결과 - 고찰 - 결론의 형태로 슬라이드를 구성한다.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안전한 방식이다. 문제는 내용이 엄청나게 흥미롭지 않다면 이 흐름은 굉장히 식상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허구한날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논문인데, 똑같은 사고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발표라면 이건 논문을 오디오북으로 해서 듣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논문은 체계적인 사실과 지식의 전달을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이므로 흥미로움이라는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적은 편이며, 따라서 발표자가 달변가가 아닌 이상 이와 같은 흐름으로 진행되는 학술대회 발표는 재미있을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그리고 더 핵심적인 큰 문제는, 발표자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발표를 진행한다는 데 있다. 발표의 목적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중들로 하여금 내가 진행한 것을 이해하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아쉽게도 청자의 이해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발표가 대부분이다. 자연히 청자는 발표내용으로부터 소외당하며, 발표자의 발표 내용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버린다. 심지어 청자가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의 그래프와 수식, 전문 용어가 등장하면 청자의 흥미도는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하여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어떤 이의 발표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려면, 청중들도 발표자가 가졌던 궁금증에 동감할 수 있게 해야하며 거기서부터 출발한 실험방법과 결과가 청중의 이해와 기대에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특히 결과 슬라이드를 보여줄 때 발표의 성패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는데, 대체로 성공한 발표에서는 결과 슬라이드를 보여줄 때 청중들의 반응이 확 느껴질 때가 있다: 끄덕이는 사람들, 혹은 입모양, 주변 사람들과 속닥거리는 모습 등등 말이다. 사람들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므로 그 어떤 발표보다도 '나'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면 최고의 발표라고 생각하며 '지금 발표를 들으시면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않으셨나요? 네, 정말 그렇습니다.'라는 흐름으로 발표가 진행될 때 자신의 사고와 과학적 통찰력이 과히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약간의 우쭐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감정을 심겨주는 발표가 바로 성공한 발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학술대회 발표를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발표 자료를 갈고 닦아야만 흥미로운 발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먼저 논문 형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논문에 들어간 자료를 모두 다 보여줄 필요도 없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논문 서론에나 쓰일 법한' 사실에 대한 기술들은 과감히 생략해도 된다: 예를 들면 현재 플라스틱 쓰레기의 양은 해마다 몇 톤 증가하고 바다에 방류되는 쓰레기 총량 중 얼마가...... 그냥 방류된 쓰레기에 고통받는 물개 사진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청중들을 실험에 적극 참여시켜야 한다. 이 발표를 듣는 동안만큼은 나와 함께 실험을 가상으로 해보면서 이 궁금증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결과 사진들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동시에 핵심적인 결과는 반복적으로 언급함으로서 발표가 끝난 시점에서 그 그림들과 서술들은 잊혀지더라도 '저 발표자가 이런 말은 했다.'라는 것을 반드시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발표 중 청중들과의 소통이다. 발표자의 시선은 발표 시간 대부준 청중들을 향해야 한다. 대화하듯이 얘기하되 발표자가 청중들보다는 좀 더 높은 위치에서 ㅡ 당연하다. 이 발표 내용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발표자 당사자이기 때문에 정보의 비대칭 상황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ㅡ 청중들을 구워 삶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부정적인 표현이나 불필요한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가끔 겸손해 보일 목적으로 굳이 할 필요 없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안 될 일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가설이 옳았음을 확인할 때 희열을 느끼고, 남들로부터 그 결과가 인정받을 때 희열을 느끼는데, 강연의 호평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앞으로도 이 두 희열을 번갈아가며 계속 느꼈으면 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