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일종의 문학작품으로 인식한다면 정경을 확정하고 순서를 확정한 교부들은 굉장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극초반주인 창세기와 탈출기(출애굽기)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서사가 펼쳐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인 레위기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각종 제례와 시설 묘사 등을 읽다가 질려버린 모든 독자들이 책을 덮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나마 성경은 나은 편일 지도 모른다 ㅡ 몇몇 소설은 초장부터 변죽을 울리는 것같은 주변 묘사에만 몇 쪽을, 아니 한 장을 다 할애하니까 말이다. 어렸을 때는 '레 미제라블'의 첫 장인 '비앵브뉘 각하'를 읽다가 "도대체 장발장은 언제 나오는 거야?" 하며 책을 덮어버린 적이 몇 번 있었고,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를 처음 읽었을 땐 내가 무슨 유적지 안내도를 샀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이 학습효과 덕분에 그 다음에 읽은 '장미의 이름'은 끈기를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3월에도 집합 공부, 4월에도 집합 공부, 5월에도 집합 공부를 하는 중학생들처럼 나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소설의 초반부만 읽곤 했고, 책갈피는 20쪽에 끼워져 있다가, 몇 주 뒤엔 23쪽에 끼워져 있다가, 몇 달 뒤에는 아예 17쪽에 끼워져 있곤 했다.


소설을 지독히도 안 읽는 내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동안 정좌한 채 다니는 시간들이 점차 늘어가면서부터이다. 호기롭게 '달과 6펜스', '주홍글씨' 같은 책을 샀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 내가 최근에 산 책은 꽤나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는 국내소설인 '아몬드'라는 책이었는데, 읽다보니 예의 '레 미제라블' 책을 떠올려보자면 이미 20쪽을 넘어가기 전에 사람이 죽었다. 모파상의 '목걸이'에 등장하는 "어머, 그거 싸구려 가짜 목걸이였는데"라는 반전은 소설 마지막 쪽 마지막 줄에 등장해 버리는데 이미 여기서는 "응, 뭐라고?" 싶은 구절이 몇 쪽 안 넘겨서 나와버리곤 했다. 기상이변 때문에 빠르게 찾아 온 더위같이, 예고 없이 내린 초가을의 서릿발처럼 당황스럽게 빠른 느낌, 비둘기호를 타고 다니던 여행객이 KTX를 처음 탈 때의 충격감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의 '기승전결'이라는 서사구조는 변할 것이 없겠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변화하고 또 대중의 입맛에 맞게 진화하는 것이리라. 사실 하루만에 '장편소설'이라 이름붙은 책 한권을 해치워버리고나서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어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ㅡ 다분히 옆길로 새는 이야기긴 하지만 ㅡ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소설 쓰는 것과 다름 없다는 과학논문은 과연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졌다. 대체로 보수적인 학계의 변화는 굉장히 느리지만 어쨌든 바뀔 것은 바뀐다. 요즘 청소년들은 궁금한 게 있으면 구글로 검색해서 텍스트와 사진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로 검색하여 영상을 찾아본다고 한다. 이는 어린 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노인 세대들도 활자로 된 기사를 찾아 읽지 않고 유튜브로 된 개인 미디어 영상을 찾아 즐겨 본다. 나 역시 미네소타에서 관 크로마토그래피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배웠다. 그런 점에서 과학 전문지식의 전파 역시 지금의 활자 기반이 아닌 영상 기반으로 바뀌지 않을까. 이제 오픈 액세스(open access)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때가 머지 않았는데, 이런 변혁을 곱씹어보면 잡지 기반의 논문(論文)보다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논영상(論影像?)이 먼 미래 세대에겐 더 잘 읽히는, 아니 조회되고 구독되는 것이 된다는 것이 허튼 소리만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