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키무키만만수를 알게 된 것은 올해 초였다. 「안드로메다」라는 실로 청자(聽者)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낼 법한 노래의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된 뒤 충격을 먹어 '과연 이 인간들은 어떤 자들인가?'하는 궁금증을 품에 안고 그들의 라이브 영상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그들의 라이브 영상들은 한 번만 볼 수는 없었는데, 계속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소개된 노래 「투쟁과 다이어트」라는 노래를 유튜브에서 처음 재생하여 한 번 들었을 때, 이 노래는 우스꽝스럽게 괴성을 질러대며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비애와 고역을 망측하게 표현하는 노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묘한 매력에 이끌려) 다시 몇번 돌려보다가 영상 초반 설명에 "투쟁을 하면 다이어트를 하게 되고, 다이어트를 하면 투쟁을 하게 된다"라는 문구를 보고 굉장히 크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다시 이 노래 가사를 음미해(?) 보면, 이 노래가 단식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절규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어머니!)


그냥 잘 살고싶다오

편히 잘 살고싶다오

있는 그대로 살고싶다오

그게 그리 큰 꿈이었던가


그들은 배불리 먹고

고급스런 상점에 들어가네

나는 여기에 남겨져서는

운동만 열심히 해야하지 (투쟁!)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어머니!)


이렇게 운동만 하고

건강은 자꾸 나빠지는데

먹고싶은 것 먹지 못하고

배가 고파도 참아야하네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어머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살아야 하네

살아야 하네

살아야 하네

살아야 하네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되는 가사는 더욱 끔찍한 현실 묘사를 하고 있다. 거리에 나와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오"하고 투쟁을 외치다보면 메아리 없는 현실에 가끔 "왜 내가 이러고 있나"하고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고, 남들이 고급스런 상점에 들를 때 자기는 구호를 외치며 먹는 것도 못 먹으며 자기 건강마저 깎아먹는 운동 ㅡ 그 운동말고 운동권의 운동이 연상된다. ㅡ 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서럽게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을지도. 이 얼마나 단식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적절하게 담아 낸 곡 아닌가! 아니 어떻게 이렇게 기발하게 가사를 쓰고 제목을 '투쟁과 다이어트'라고 영리하게 지었을꼬. 게다가 이들이 추구하는 괴성의 창법은 이 노래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의 처지로만 이 노래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창법으로부터 골계미(滑稽美)가 느껴지는 것이지만, 투쟁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처지로 이 노래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괴성에서는 이제 비장미(悲壯美)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이 비장미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주 극대화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크나큰 상실감 앞에서 내뱉는 탄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며 '아이고, 그이가 날 떠났으니 이제 난 어떻게 산단 말이냐.'에서의 그 '어떻게'의 용법이 되는 것이다. 투쟁하는 사람,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 모두 절대적인 좌절감을 맛보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에 나올 법한 장탄식일텐데, 그 때 무키무키만만수는 단호하게 음색을 고쳐먹고 '살아야 하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족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의문문으로 이해한다면 분위기가 약간 묘해진다. 다이어트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에게나 투쟁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무키무키만만수의 대답은 꽤나 섬뜩한 정언명령(?)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살아야 하네." 묻는 사람은 '어떻게?'를 물었는데 대답하는 사람은 그것마저 무시해 버리고 말한다: "살아야 하네." 이 답변에는 왜 살아야 하는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삶은 어떤 식으로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다. 그러다보니 이 단언(斷言)에서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뱃살, 혹은 가혹한 현실과 맞서 투쟁하다보니 어느 순간 그 행위의 이유와 목적마저 상실한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그 와중에 코끝을 스치는 B급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뭐 B급의 비장함도 비장함이니.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