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갑자기 어머니로부터 날아온 카톡 사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년 5월에 응시한 스페인어 시험 DELE (Diploma de Español como Lengua Extranjera) 의 A2 레벨 합격증이었다. 채점이 작년 8월경에 마무리되었다는데, 합격증은 정말 반년이나 걸려 한국 집에 전달되었다.


합격증 사진을 보는 순간 다양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박사과정 기간동안 잠시 놓고 있었던 스페인어공부를 다시 하겠노라고 스페인어학원 수강 신청을 했던 순간, 처음 회화 수업에 들어가서 거의 8년만에 스페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온갖 어려움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던 그 순간, 처음 DELE A2 레벨 듣기평가 녹음 파일을 듣고 '초급인데 뭐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게 빠르게 말해?'라며 잠시 멘붕에 빠졌던 순간, 시험 장소에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았던 중고등학생들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가졌던 순간, 마지막 회화 시험을 아침 일찍 마치고 난 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안양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꾸벅꾸벅 졸았던 순간 등등.


스페인어를 잘하고 싶은 욕심은 사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심 그 이상이다. 어쩌면 그 이유는 '내가 스페인어를 영어보다 더 잘할 리 만무하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내 목표는 나이 마흔에 접어들 때 B2 레벨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는 것인데, A2보다 B1이 훨씬 어렵고, 또 B1보다 B2가 훨씬 어렵다니까 조바심 내지 말고 꾸준히 길게 보며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페인어가 가지는 세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아시아계 과학기술자들 중에 스페인어에 친숙하거나 능통한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이베로아메리카(Iberoamerica) 지역은 자연과학기술 세계에서 변방에 속한다. 유럽의 자연과학은 영국, 프랑스, 독일 중심이었으며 피레네 산맥 너머에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과학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베로아메리카 지역은 인문학이 자연과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동네이다. 이 지역에서 나온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꽤 여럿 있지만 자연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심지어 자연과학 전문가들이 기억하는 과학 위인들 중 이베로아메리카 태생 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 아니 아예 없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베로아메리카 세계가 과학과 무관한 갈라파고스 섬처럼 남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역의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성숙해갈수록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고도의 자연과학 및 기술 발전이 당연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지역에도 자연과학 및 공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이 나라들과 학술적인 교류를 시도해 볼 때가 언젠가는 올 지도 모른다. 즉, 비록 지금은 싼 인건비로 인해 우리 나라 회사들의 공장들이 이 지역에 진출해 있는 것 정도가 유일한 이베로아메리카 세계와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접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수십년 뒤에는 그 접점들이 굉장히 다양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혹여나 그 시점에, 내가 익힌 스페인어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