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축구경기에 큰 관심을 쏟지 않는 나로서는 월드컵 개막일이 언제인지, 우리나라는 몇 시에 누구와 경기를 하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도 기사에서 떠들어대서 우리나라가 속한 조에 러시아, 벨기에, 알제리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숙지하고 있으나 그 팀들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아니면 그런 걸 논할 처지가 못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12년 전인 2002년은 그야말로 '미친' 해가 아니었다 싶다. 지금 원정 16강을 다시 오르기에도 이렇게 벅차다고들 야단인데 어떻게 그 땐 4강 안에 들었던 것일까? 최근에 위키피디아에서 역대 월드컵 4강 국가 명단을 봤는데, 그 수십년의 장구한 월드컵 역사 가운데 4강 안에 들었던 아시아 국가는 오직 2002년 때 3-4위전에 맞붙었던 대한민국과 터키였다. 터키가 지리적 측면으로나 스포츠 교류 측면에서나 유럽과 가깝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사실상 지금까지 월드컵 4강에 올랐던 아시아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 때의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박혀있다. 생애 단 한번도 흡입하지 않았던 마약을 단숨에 집어삼킨 것 같은 그런 강한 희열같은 것이 2002년을 지켜 본 대부분의 국민들 가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최면과 주의 분산 처방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인지라 4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도, 2010년에도 사람들은 어김없이 붉은 옷을 입고 광장에 나왔고, 한국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약발(?)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12년이 흐르면서 과거의 강렬했던 그 열정은 마치 혈기 왕성했던 청춘 시절의 추억처럼 먼지를 뒤집어쓴 듯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심장은 격렬히 쿵쾅거리는 것 같으나 머리는 차분하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미워도 다시한번' 을 부르기보다 '그땐 그랬지'를 선호하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지구 중심을 향해 계속 파고들어가서 구체의 반대편으로 나오게 되면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나온다는데, 그렇게나 멀고 먼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월드컵도 그저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동안 축구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독의 첫째 조건은 지속적으로 유효 수준 이상의 외부 자극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그 '맛'을 잊고 살았다. 확실히 예전만 분위기가 못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대표팀이 후회없이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좋은 성적을 바라지 않으면서 열심히 해달라는 주문은 좀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다만, 나라가 어지러운 이 때에 힘들고 지친 국민들에게 낭보를 전해달라는 산업화 시대의 메시지같은 건 보내고 싶지가 않다.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아시안 게임이든 이것은 스포츠 축제이자 교류의 장이다. 부디 선수들이나 스태프들이나 그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국민들이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월드컵이 되길 기원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