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큰 학회들에 가게 되면 여러 과학 강연들 말고도 박람회장에 볼거리가 꽤 많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온갖 다양한 첨단 분석 및 제조 기기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각종 시약 판매업자들은 고급의 독창적인 시약들을 판매한다고 카탈로그를 뿌리느라 여념이 없다. 이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꾸준히 받는 부스는 바로 출판업자들 부스인데, 이번 학회 때에는 옥스포드(Oxford) 대학 출판사 부스에 잠시 들렀었다. 옥스포드 출판사는 과학 저널을 출판하지 않고 과학 서적 출판에 주력하는 회사이다. 수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물리학 교재 시리즈인 옥스포드 마스터 시리즈 인 피직스(Oxford Master Series in Physics)가 가장 유명하며, 집약적이고도 훌륭한 설명으로 전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금껏 출판사 부스는 늘 쭉 둘러보고 나오기만 했기에 별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부스에서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으니, 그 책의 제목은 바로 'Physics of the Piano' 였다. 나는 몇 장을 뒤적여 읽어보고 나서 사야겠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주저하지 않고 부스에 상주해 있던 직원에게 다가갔다. 부스에서 책을 직접 구매할 수 있다는 말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카드를 긁어 일사천리로 구매를 마쳤다.


퍼듀(Purdue) 대학의 N. Giordano 교수가 쓴 이 책은 한동안 내가 상당히 관심있었던 건반 악기의 작동 원리 및 현의 진동과 발음(發音), 스케일(scale)과 조율, 그리고 이와 관련된 발전 역사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하프시코드(harpsichord)에 대한 이야기도 약간은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책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러한 모든 내용들을 비과학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ㅡ 물론 물리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ㅡ 잘 써 놓았다는 점이다. 책 제목이 '피아노의 물리학'이니만큼 물리학 용어와 수식이 빠질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수식 일변도의 물리학이 전혀 아니며 최대한 많은 부분들을 쉬운 설명을 통해 표현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교재로 해서 수업을 진행해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친절하고 쉽게 잘 쓰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차 안에서나 자기 전에 침대에서 꼭 이 책을 붙잡고 적어도 한 섹션씩 읽고 있다. 이 책을 산 당일 학회장에서 1장을 다 읽고 나서 '아, 이 책 사길 잘 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이 책을 근간으로 해서 주변 사람들을 잘 가르쳐도 괜찮겠다'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잘 쓰인 책이고 지식과 정보가 풍부한 책이다. 그동안 간과하고 지나쳤던 피아노의 각 구성 요소들, 그리고 경험적으로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던 연주 방법과 피아노 소리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 모든 것들이 3세기동안 피아노를 만들어 온 장인들과 연주해 온 음악가들 사이에서 축적된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은 단순히 건반을 눌러 박자대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고 강약을 조절하며 그 음색을 곡과 연주자의 느낌대로 잘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다른 의미에서는 이것이 곧 '피아노의 물리학을 잘 응용한다'는 것과 같은 명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고보면 과학자야말로 음악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다. 피타고라스도 그랬고, 가깝게는 아인슈타인도 그랬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읽다보니 이제는 정격 연주에나 쓰이는 과거의 악기가 된 리코더와 그 리코더를 누르고 콘서트장에 화려하게 등장한 플룻의 역사를 물리학적 관점에서 다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