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일기를 남기지 못했다. 심지어 그 영광스러운 크리스마스에도! 홈페이지에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며 그간 있었던 일들 중 가장 중요한 교단 전입예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2012년부터 History of Christianity 라는 교회사 책을 탐독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근본 교리의 다름보다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이질감이 기독교의 분열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었다. 종교 개혁 운동은 그러한 모든 다름 혹은 오류를 극복하고 기독교를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갱생시킬 수 있는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본래의 의미가 가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점차 서방 교회 내에서 개신교회의 개혁 목적은 점차 '로마 가톨릭과는 언제나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그 결과 과거의 기독교 전통과 포용의 정신은 상실되고 말았다.


한편 효율적인 집단 지도 체제 하의 개교회(皆敎會)주의를 표방하는 교회, 특히 한국 개신교의 주류인 장로교(長老敎)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급속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에서 표방하는 신학적인 입장과 교회 치리 방식은 아무래도 한국인들의 정신과는 괴리가 있는 듯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으로 인한 구원론은 한국인 심성 기저에 깔려 있는 상선벌악(賞善罰惡), 인과응보(因果應報) 정신과 상충하였다. 그리고 수평적인 집단 체제인 장로와 집사(執事) 체제는 서열문화의 풍조가 어디에서나 진하게 남아 있는 한국 사회를 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불편하게 녹아 들어가 있었으며 이따금씩 잘못된, 왜곡된 교회 치리의 단면이 불거지곤 하였다.


무엇보다도 개교회주의는 전국에 무분별한 교회의 확장을 야기하였고 동시에 함량 미달의, 검증되지 못한 성직자들의 양산으로 이어졌다. 급속도로 커진 교세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모든 교회들은 사력을 다해 전보다 더 열심을 다했지만, 그 열심은 때론 타 교단에 대한 무지와 무시, 그리고 독선적인 태도로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항상 열심에는 무리도 따르는 법인지라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선 이상을 넘어선 부조리들이 빚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인 특유의 다혈질적인 특성, 토론할 줄 모르는 비타협적 고집, 샘내는 기질은 성장 일변도로 나아가는 교회 내에서 제어되기 어려웠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특성들은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급속한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워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 교인들조차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로교 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 교회 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인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교인들은 더 이상 성경을 읽지 않은 채 은혜와 성령만을 부르짖으며 기도의 시간을 시끄럽게만 채워가게 되었고, 교회를 사목하는 사람들의 설교 또한 성경을 기반으로 한 자기 주장을 되풀이하는데 진지한 신학적 요체(要體)가 사라지니 설교가 아니라 훈계가 되어버렸다. 교인들은 교회 내 모임에서 '열심히 기도해야죠',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야죠' 하는 흔해 빠진, 아무런 의미 없는 입발린 기도 제목을 내놓는 데만 익숙해졌고, 세상에 나가서는 가식적인 모습으로 다른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을 시쳇말로 '충공깽'에 빠뜨렸다.


심지어 교회 치리의 핵심이자 당회의 주요 인사인 장로들이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주일에까지 공부시킨답시고 교회로 보내지 않고 대신 학원에 보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중직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는커녕 아주 기본적인 의무조차도 이행하기를 바라는 것조차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직자(重職者)가 아닌 평신도들이 그러한 장로들의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그렇지 못하다. 그 장로들을 선출한 것은 평신도들이며, 이들 역시 교인의 신앙과 자질, 인성보다는 금전적 수입과 사회적 지위, 교인 사이에서의 인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회중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함정이자 약점이요, 심각한 문제였다. 계서제(階序制)를 거부하고 비교적 민주적인 치리 형태를 가진 장로교에서 정작 민주주의가 실종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아닌가.


이 모든 복합적인 요인들이 나로 하여금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나오게끔 하였다. 세상의 평화와 세상을 향한 사랑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3년부터 기나긴 탐색의 여정에 돌입했다. 가장 처음 방문한 것이 한국 천주교(天主敎) 명동 성당의 저녁 미사였고, 그 다음 방문한 것이 한국 정교회(正敎會)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의 만도(晩禱, 저녁 기도)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이 채택하는 교황(敎皇) 제도는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교황제도야 말로 교회의 분열을 가져 온 가장 큰 문제적 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다른 교단으로부터 로마 가톨릭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게 해 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전근대적 절대 체제 그 자체라고 본다. 동방 정교회는 전례가 아름답고 영화롭지만 도저히 한국인의 문화와는 융화하기가 어려운 구석이 너무나도 많았다. 더구나 동방 정교회는 전통, 곧 7대 세계 공의회(公議會)와 교부(敎父)들의 가르침을 너무나도 중시한 나머지 그 교리와 고백이 1,000년 이상을 거쳐 오면서 전혀 개혁되거나 수정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도 그리 옳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고 나니 내가 다음으로 방문해야 할 교회는 루터교 혹은 성공회(聖公會)였다. 두 교단은 종교 개혁 초기 시기의 교회들이지만 서방 교회의 전통적인 양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리적으로도 극단적인 개혁 성향이 아닌 부분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루터교는 성찬례에서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은 아니지만 칼뱅(Calvin)의 영적 임재설보다는 보다는 화체설에 가까운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ion)을 주장하고, 성공회에는 전통적인 7성사에 해당하는 것들이 모두 성사 혹은 성사적 예식으로 교회 예전에 남아있다. 그런데 2013년 당시 대한성공회 안양교회는 우리 집 근처 삼봉 프라자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엄청 가까웠고, 이에 반해 루터교회는 위치가 애매한 곳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성공회 교회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대한성공회 안양교회를 방문한 것은 2013년 5월 20일의 일이었고 해당 내용은 http://fluorf.net/xe/5976 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공회의 절충된 전례와 신학적인 관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나는 기회가 허락되었던 때에 세 번 더 안양교회에 방문했었다. 그 때마다 차준섭 미카엘 신부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고민과 궁금증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려 하셨다. 나는 신부님께 책 몇 권을 빌려 주실 것을 요청하였고 신부님은 흔쾌히 이를 수락하시어 성공회 예전(禮典)에 관한 책, 역사에 관한 책, 그리고 교리에 관한 입장을 간략히 담은 책, 총 세 권을 빌려 주셨다. 이 책들은 성공회에 입문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 주었다. 성서, 전통, 이성을 모토로 한 성공회의 정신은 충분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었고, 또 내가 생각하는 중용(中庸) 정신과도 크게 맞닿아 있었다.


또한 미국에 학회로 나가 있을 때 방문한 미국 성공회 교회는 보편 교회(catholic church)가 가지는 은총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외연은 다르지만 어디서나 다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나는 교단 전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여 지난 조지아 여행 때 부모님께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장로교 장로를 아버지로 두고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겐 꽤나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두 분 모두 나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존중해 주셨고, 내가 이상한 사이비나 이단을 믿지 않는다면야 그러한 결정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내비쳐 주셨다. 지난 달에는 내가 아는 개신교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었고, 전입에 대한 승인과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고나니 내겐 거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세례식이 행해지는 성탄절 밤 감사성찬례 시간에, 정확히는 12월 24일에 나는 타교파 신도 영접식을 통해 성공회 교우가 되었다. 성공회에서는 세례명을 신명(信名)이라고 부르는데, 내겐 신명을 정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곧 (1) 칼케돈(Χαλκηδόν) 공의회 이전의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2) 출신 혹은 학문 배경이 동방과 서방 교회를 모두 아우를 수 있으면 좋겠다; (3) 신학자로서 교회의 화합 혹은 교리의 수호를 위해 활약한 사람이면 좋겠다; (4) 내가 가지지 못한, 배울 만한 점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4세기 신학자이자 증거자로 아레이오스(Άρειος, 라틴어로 아리우스) 이단을 공박하고 니카이아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알렉산드레이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Αθανάσιος)의 이름을 신명으로 삼았다 ㅡ 성공회에서는 교회명으로 '아타나시오'라고 부른다.


아직 성공회 기도서의 내용들을 완벽하게 숙지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성공회 예전에도 많이 익숙해진 편이고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즐기고 있는 편이다. 교회에서 공동번역성서로 선물로 주셨는데 시간 날때마다 탐독해서 우리말로 잘 번역된 이 성서도 통독해 볼 생각이다. 성공회 입교는 내 개인종교사의 획기적인, 역사적인 새출발이고 또 도전이다. 큰 결심을 하여 나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고자 결심한 만큼 나도 성심을 다해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 하느님과 교회를 사모하며 섬길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