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학교를 오는 길이 너무나도 험난했다.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동생 신혼집에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 드리고 서울대입구역에 왔는데 그 시간엔 정말 더웠고 거리에 사람도 많았다. 5513을 기다리는 길은 왜 그리 길었는지,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다음 버스 오는 시간을 앱으로 확인해보니 19분 뒤. 나는 자연대 건물로 직행하는 5513 버스 타기를 포기했고, 좀더 올라와서 서울대 정문에 하차하는 버스를 탔다. 정문에 그렇게 내리고 나니 어찌나 사람은 또 그리 많던지. 하도 수많은 사람들에 치이다보니 시원한 커피가 급 당겼고, 그래서 학교 미술관 아래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기획 전시가 바뀐 모양이었다. 분명 저번에 본 것은 '숭고의 마조히즘'이었는데 오늘 보니 '조각가 김종영 100주년 기념 전시회'였다. 그러고보니 오는 길에 전자메일함에 있던 수많은 알림 메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전시회 홍보 메일이었다. 조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고등학교 미술 수업 수준에 그쳐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들어서 ㅡ 사실 우리나라에 탄생한지 100년이나 되는 조각가가 있긴 한건가? 하는 궁금증이 강했다. ㅡ 커피사는 것은 미룬 채 무작정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조소 작품들이라고 하면 늘 사람 조각상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조소 작품이라고 하면 흔히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등을 떠올린다. 조소야말로 입체라는 3차원 공간 속에서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가장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내 생각은 이미 2~3천년전의 이집트, 그리스 예술가,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의 나무 깎던 장인들에게서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2차원 평면에 그려내는 회화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가장 먼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눈에 쉽게 보이는 자연물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다가 문명이 진보하고 철에 눈을 뜨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을 표현해 내는 추상화로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알게 된 것이, 지금껏 내 사유는 2차원 평면의 회화 영역에서만 표현되는 추상적인 존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 2차원 추상화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여러 미술사조와 유명 작품을 배우다보면 칸딘스키(Кандинский)나 몬드리안(Mondiran), 폴락(Pollock)이 나온다. 그리고 점 하나만 그려놓고 '무제(無題)'라고 제목 아닌 제목을 붙이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나도 예술할 수 있겠다'라고 혀를 끌끌 차는 것, 누구나가 다 경험해봤을 것이다. 처음엔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말하겠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거기서 어떤 추상적인 함의를 발견해내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면 어떤 이들의 추상적 표현에도 공감이 가고, 그러다가 그 대상에 대해 이해가 가게 된다. 난해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현대 음악과는 달리 현대 미술은 정말 난해할 정도로 단순화된 0차원의 점(點), 1차원의 선(線), 그리고 2차원의 면(面) 그 자체로서도 이해되고 긍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추상화는 예술가들의 장난놀음이며 물자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감상조차 위선적으로 사치스러운 것일 뿐이다.)


오늘 전시회에서 김종영 선생의 조각 작품들은 내게 이렇게 질문했다. "왜 공간(空間)은 빼고 생각하니?"


우리가 3차원에 산다고 해서, 우리의 실체가 3차원 유클리드 공간으로 인지되는 물체라고 해서 추상적인 개념이 3차원에서 표현되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둥글고 붉은 계열의 색상이 따뜻한 추상임을 2차원 회화에서 느꼈다면 붉은 빛이 도는 둥글게 조각된 돌을 보고 따뜻한 추상적 개념을 읽어낼 수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게다가 조각 작품은 360도, 위 아래에서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감상은 훨씬 자유롭고 담아낼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은 더 다양해질 수 있다. 그러니 2차원 추상화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새로운 차원의 추상적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추상 조각조차 예술가들의 장난놀음이며 물자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감상조차 위선적으로 고차원(high-dimensional)적인 사치스러운 것일 뿐이다.]


그리고 2차원 회화에서 채색 재료를 통해 대상의 특성 및 질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3차원 조소 작품에서는 재료 자체가 그것을 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새삼 처음 느꼈다. 조각 작품 중에 돌을 이용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퇴적암의 경우에는 아무리 같은 모양으로 깎아놓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가진 고유의 무늬와 결에 따라 수용되는 느낌이 무지하게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적인 무늬가 있는 나무는 또 어떠한가. 조각가는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작품을 세심하게 만들어냈을텐데 그것이 그들만의 표현방법이라는 점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벽에 쓰여 있던 작가의 말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았다. (참 인상적이라서 사진을 찍어놓기까지 했다.)


"과연 조각의 세계는 물체의 모사(模寫)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체를 형성하는 괴(塊)는 그 자체의 고유한 감각을 갖는다. 이 괴를 구체적인 자연의 존재로 보여주는 데서 조각의 표현이 있고 이러한 괴체(塊體)에서 어떤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의 시초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문구를 읽은 시점에서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 얘기했던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자면 나는 '조소의 의의는 현실의 복제품 생산'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 故 김종영 교수님은 조소가 가지고 있는 그 내재적 지향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캔버스 위에 세심히 찍은 점에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길가에 놓인 돌덩어리 하나에는 보다 더 높은 차원 ㅡ 중의적인 표현이다. ㅡ 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조소를 통한 표현과 감상의 기본이리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어라. 사각의 캔버스에 한정된 화가들의 표현과는 달리 조각가들은 3차원의 공간을 원한다면 더 폭넓고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조소를 하는 사람들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을 마친 뒤 오늘 미술관에 충동적으로라도 들어가길 잘 했다고 생각한 나는 원래 목적대로 지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고 실험실로 향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