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부탁을 받아 과학 강의를 하나 준비했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학생들 스무 명 정도를 모아서 창의 융합 특강 이런 것을 실시하는데 성수가 과학 철학 쪽을 맡아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은 것이 내가 독일로 떠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냥 과학을 강의하는 것도 여러번 준비해야 잘 얘기할 수 있을까 싶은데 내 전공도 아닌 과학 철학을? 내가 독일과 영국, 프랑스를 도는 동안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나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달달 읽었던 건 지식욕이나 교양 이런 형이상학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현실적으로 당장 귀국 후에 베풀어야 할 강의의 내용을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함이었다.


칼 포퍼(Karl Popper)의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나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 개념은 이미 예전에도 익히 들어봤던 것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 개념 단어인지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읽다 보니 왜 이 책이 서울대 선정 권장 도서 100권에 들어가며, 왜 이 책이 언제 어디서나 과학 철학 도서 중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패러다임과 정상과학(normal science)에 대한 그의 발상은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현명하다. 강의를 들을 아이들보다 오히려 준비하는 내가 공부가 더 많이 되었다.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던 과학 철학 내용, 그러나 강의를 막상 준비하다보니 얘기해줄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다는 걸 느껴 오히려 자료를 줄이느라 고생했다. 귀납주의와 반증주의, 그리고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현 사상의 지평을 짤막하게 맛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 강의는 아인슈타인(Einstein)의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꾸며졌다. 많은 아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정식과 개념에 다소 힘들어하는 눈치였지만 ㅡ 그래서 마지막 강의 때는 조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ㅡ 그래도 잘 따라와주었다.


게중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학생, 적극적으로 대답하는 학생, 스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학생,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 학생, 자는 학생 정말 다양했다. 아침부터 기숙사로부터 나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이것이 끝나면 자율학습하러 가야한다고 말한 이 고등학생들. 똑똑한 후배들이 대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방학인데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경쟁적인 입시에 신음하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 잘 즐기며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랜만에 선생님들을 뵙고, 또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승낙할 것 같다. 좀 더 쉽고 재미있게 과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에 대해서 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