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래핀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안드레 가임(Andre Geim), 콘스탄틴 노보셀로프(Konstantin Novoselov)가 속한 맨체스터 대학교(University of Manchster)의 응집 물질 물리학 연구단(Condensed Matter Physics Group)을 방문했다. 이곳에 이미 방문 포닥으로 와 계신 용진형의 소개 덕분에 하루 종일 해당 연구단의 실험실을 돌아다니며 어떤 연구 인력들이 어떤 장비를 통해 그래핀 연구를 진행하는 지 잘 살펴볼 수 있었고, 특히 오후 2시에는 이 연구 그룹의 연구 펠로우(research fellow)로 있는 라훌 네어(Rahul Nair) 박사와 30분 정도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맨체스터 대학의 역사는 맨체스터 과학기술대학(UMIST)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Victoria University of Manchester)가 통합된 2004년부터 시작되지만 각 대학은 1824년과 1851년에 설립된 것으로 매우 긴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UMIST의 전신은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존 돌턴(John Dalton)이 설립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국 최대 규모의 대학답게 넓은 학교 부지를 가지고 있고 100년은 훨씬 넘은 오래된 건물 뿐 아니라 최신식 건물 ㅡ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인 국립 그래핀 연구소(National Graphene Institute) ㅡ 이 어우러져 있는 멋진 대학이다. 박사과정 동안 그래핀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그래핀 연구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의 연구 분위기는 어떠한지 궁금했는데 박사과정을 마치고나서야 이렇게 방문할 수 있었다.

 

한국에 없는 장비나 특수한 설비가 많은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시설들은 매우 특별한 연구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인데 그것이 이 연구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유일한 점이라면 한국에도 대단한 랩들은 많다. 오히려 이 대학 연구소에 있는 장비보다 더 좋은 장비들을 한국에 있는 랩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곳에는 연속적인, 그리고 통제 가능한 연구가 가능하도록 많은 설비들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충분한 공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짜여진 실험실 설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 학교라면 여기저기에 산개되어 있을 시설과 공간들이 매우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일 외적인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연구실이 충분히 넓은 공간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간 뿐 아니라 연구단 구성 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이다.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영국의 연구단 구성은 우리나라의 랩 단위 구성과는 조금 다르다. 예를들어 여기 응집 물질 물리학 연구단에는 여러 명의 교수님들과 연구 펠로우, 그룹 리더들이 있다. 그런데 각자가 연구하는 내용은 다소 다르다. 자기적인 성질을 측정하는 SQUID 를 사용하는 연구진과 필터막을 연구하는 그룹은 서로 다른 교수 혹은 펠로우의 지도를 받으며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연구단 하에서 같은 시설을 사용하며 서로 교류한다. 심지어 서로 다른 교수 사무실과 학생 연구실도 집단적으로 '응집 물질 물리학 연구단'이라고 이름 붙여진 지역에 다같이 함께 있다. 이것은 각 교수별로 다른 랩을 독립적으로 구하는 한국이나 미국과는 다른 점인데 ㅡ 독일이나 일본이 이와 비슷한 것 같다. ㅡ 이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 의견 교환과 연구 평가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외에도 펀딩이나 기타 행정적인 부분에서도 편의성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핀 소개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광학적 투명성(optical transparency)에 관한 중요한 Science 논문을 작성하신 바 있는 라훌 네어 박사님과의 만남은 갓 박사과정을 마친 내게 중요한 전기와도 같았다. 개인 면담 전에는 긴장을 많이 했는데, 정작 나중에 나는 사무실에서 실컷 영어로 물건팔이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물리학자인 그가 재료화학을 한 내 연구를 얼마나 인상 깊게 들었을는지는 잘 모르겠고,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나긋나긋한 그의 성격과 태도에 정작 말하는 나조차 민망함을 느낄 뻔했지만 그래도 30분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겐 매우 큰 경험이었다. 물론 관점의 불일치와 ㅡ sub-10 nm도 너무 큰 사이즈인 것이 물리학의 세계이다. ㅡ 펀딩의 부재는 다소 맥빠지는 점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주제의 연구를 더 이어가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조금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뭔가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그 자리에 가서 그런 대화를 진행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있었다.

 

김용진 박사님과의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용진형과는 실험과 연구 전반에 대해서 폭넓게 얘기했는데 여느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좋은 연구'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내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이 '좋은 연구'에 대한 나만의 철학 및 자세였다. 인적 네트워크, 대세를 탄 연구 주제,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스펙으로서의 포닥, 대학 이름, 미국 등등등 요즘 내 박사 과정 말기를 현실적으로 (혹은 천박하게) 바라보도록 바꾸어놓은 그 모든 주제에 비하면 용진형의 말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연구 기간 내에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인가? 나는 과연 '좋은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철학적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겐 큰 축복인 듯 싶다.


내일은 학내 클린룸에서 셀레늄화 텅스텐을 기판에 좀 얻고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 뒤 이후 연구에 대해 마저 더 얘기할 예정이다.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