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 때 종로 광장시장에 있는 주단집에 가서 도포 하나를 주문했는데, 제작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에 냉큼 상경하여 새로 지어진 도포를 가지고 왔다. 그냥 갔다만 오기엔 조금 아쉬워서 예전에 그 집에서 맞춘 흰색 도포(道袍)와 홍색 답호를 입은 채 갔다. 익산역에서부터 뭔가 주변 사람들의 흠칫하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광장시장 한 모퉁이의 2층은 죄다 주단집들이다. 들어서자마자 사장님은 '아이고, 박사님.'하면서 나를 맞아주셨다 ㅡ 내가 전통문화와는 전혀 관계 없는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안 뒤로 이 분은 나를 박사님이라고 부르신다. 새로 맞춘 보라색 도포를 보여주시면서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멋지다며 감탄을 연발하셨다. 주변에 있는 주단집 사장님들도 한 번 보시더니 아주 제대로 착장을 했다며 굉장해 보인다며 칭찬을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도포와 답호까지는 십분 양보하더라도 행전(行纏)을 차고 세조대(細條帶)까지 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사장님은 자색(紫色) 도포를 꺼내주시면서 한 번 입어보라고 하셨고, 사이즈는 예상했던 대로 잘 맞아떨어졌다. 색깔도 예쁘게 잘 나온데다가 지난 번 백색 도포보다는 얇은 편이라서 봄이나 가을에 입기에도 적절할 것 같았다.


마침 최근에 '리슬'이라는 생활한복 브랜드에서 구매한 흑색 일월오봉도 답호를 가져가서 한번 겹쳐 입어봤는데, 역시 보라색과 어느 정도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의외로 백색 도포와도 잘 맞는 것 같았다. 사장님과 상의한 결과 소매를 트는 게 아무래도 도포 위에 입기에는 괜찮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사장님은 흔쾌히 따로 돈을 받지 않고 처리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비단 위에 폴리에스터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옷감과 스타일도 필요한 법이지.


아무튼 내 인생 두 번째 도포가 이렇게 품에 들어왔다. 작년에 마음먹은대로 매년 한 두벌씩 한복을 맞출 예정인데, 생각보다 불편하지도 않고 어디 돌아다니기에도 괜찮아서 잘 애용할 듯 하다. 3월 말에는 다른 공방에 주문한 백색 ㅡ 정확히는 미약한 창색(蒼色)이 스며든 듯한 백색 ㅡ 중치막과, 동정을 새로 달고 약간의 리폼을 부탁드린 흑색 두루마기를 받아올 예정인데, 그것도 기대가 된다. 아래는 어제와 오늘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경험한 짤막한 에피소드들.


- 실을 가지고 직물을 만드는 사람, 직물을 염색하는 사람, 옷감을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사람, 한복을 파는 사람, 그리고 한복에 어울리는 각종 잡화와 장신구를 파는 사람들이 광장시장에 모두 있었다. 그만큼 한복과 관련된 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한복 시장 ㅡ 장소로서의 시장이 아니라 경제학적 추상용어로서의 시장 ㅡ 이 축소되면 이분들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잠깐 생각해보았다.


- 내가 거래하는 주단집 맞은편에서는 모녀가 상담중이었다. 아마 딸이 결혼을 하는 듯한데, 주단집 사장님과 옷 색깔이나 스타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딸은 아마 치마에 양장처럼 약간의 주름이 들어간 스타일을 선호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들은 친정엄마는 한복은 한복다워야 한다며 그런 것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딱 잘라 말했고, 딸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순간 한복이 한복다워야한다는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100년 전 한복이 200년 전과 다르고, 300년 전과 다르고, 500년 전과 다르거늘, 변하기 마련인 의복 문화와 전통을 두고 도대체 자신이 한복다움으로 삼는 레퍼런스는 언젯적 한복이란 말인가.


- 광장시장이 있는 종로5가에서 호기롭게 경복궁(景福宮)까지 걸어갔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 혼났다. 특히 어제와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았어도 날씨가 따뜻해서 거리에 나온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 인원들을 뚫고 가야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새로 산 태사혜(太史鞋)는 아직 발에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 불편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지하철을 탈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가다가 잠시 재미있는 간판을 발견해서 사진을 찍는데 한 커플이 접근하더니 '옷이 멋져요.'라고 하셨다. 수줍게 감사하다고 답을 했다.


- 처음으로 한복을 입고 들어간 경복궁. 매표소에서는 무료 입장이라며 돈을 받지 않고 티켓 하나를 건네주었다. 일단 화장실부터 들어가서 갓부터 쓰고 나왔다. 나 외에도 한복을 입고 경복궁 나들이를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는데, 외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정말 많았다. 여자들은 대개 좁은 소매(=협수)를 한 짧은 저고리에 크리놀린(crinoline)위에 얹어 풍성하게 부푼 것 같은 치마를 입었고, 주로 백색 옷감에 금박 장식이 있었는데 종종 끈이나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남자들은 다양했는데, 주로 저고리와 바지 위에 배자나 쾌자를 입은 경우가 많았고, 철릭이나 곤룡포도 가끔 눈에 띄었다. 나처럼 도포와 답호를 입은 경우는 딱 두 명만 보았다. 갓을 쓴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대개 망건이나 탕건 없이 갓만 쓰거나 혹은 머리 뒤로 젖힌 채 다녔고, 간혹 익선관(!)을 쓰고 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로5가쪽에서만 해도 한복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경복궁 근처에 오자 한복 입은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진짜 이 지역은 한복 대여가 대세가 되긴 했구나 싶었다.


- 용산역에서 익산발 KTX를 타기 위해 경복궁 역에 내려가 3호선 열차를 기다리던 중, 한 어르신이 다가와서 내게 광화문(光化門) 수문장 교대식이 끝났냐고 물으셨다. 마침 갓을 벗고 있던 나는, 그걸 보고 내려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 어르신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반납하고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하셨고, 나는 이 옷은 제 옷이라서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조금 놀라셨는지 허허 웃으시면서 지나가셨다.

- 생각보다 날이 더워서 저고리와 배자 사이에 패딩조끼를 입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 교회에 자색 도포를 입고갔는데, 신부님께서는 감사성찬례 후에 나를 보시더니 교회 전례복을 토착화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런 옷을 성직자들에게 입히면 어떨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성공회 신부님들은 안에 캐석(cassock)이라고 하는 검은 사제복을 입고, 그 위에 중백의(suplice)나 장백의(alb)와 같은 흰 옷을 입은 뒤 영대(stole)를 하고 마지막으로 제의(chasuble)를 입는다. 캐석이나 백의는 왠지 중치막과 도포와 같은 포 계열의 겉옷으로 적절하게 치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판초(pancho)처럼 생긴 제의에 딱 대응하는 한복이 없어서 그것만큼은 변형을 해야 할 것 같다. 반수답호로 하면 어렵겠지...?


- 감사성찬례가 끝나고 무성서원(武城書院)에 갔는데, 내 뒤에 서원에 방문한 사람들이 나를 보더니 서원 관리자냐고 물었다. 그냥 옷을 이렇게 입고 온 방문객에 불과하다고 하니 참 신기하고 특이하신데 옷이 멋지다고 하셨다. 날이 더운데 한복을 입으면 덥지 않냐고 하셨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자색 도포는 한 겹짜리 포라서 그렇게 덥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나오는 길에 태산선비문화관이라는 데 들러서 뭐가 있나 보려고 했더니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 그냥 익산 집으로 돌아왔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