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부터 차근차근히 준비해왔던 견진(堅振, Confirmation)의 예식이 오늘 성공회 미네소타 교구의 주교좌성당인 St. Mark's Episcopal Cathedral에서 진행되었다. 원래 한복을 입고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 계획을 바꿔 양복을 입고 갔다. 이 한복 옷감이 물에 젖으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이 많이 생긴다고 들어서 굉장히 쫄았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만큼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당혹스럽긴 했지만, 최근엔 양복을 한복보다 덜 입었기 때문에 차라리 오랜만에 양복을 입는 것이 스타일상 더 낫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집을 나섰다.


오후 2시에 진행된 감사성찬례는 견진과 전입(reception) 예식을 포함하는, 연중 한 번 있는 성찬례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는 견진의 예식을 주교가 집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는 교구의 대표가 되는 주교의 참석을 통해 교구 내 본당의 일치와 화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주교가 사목적 방문의 목적으로 지역 본당에 갔을 때 견진이 진행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교구의 지리적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때야 가능한 일인 듯 싶다. 미네소타 교구가 관할하는 영역은 대한민국보다도 더 크기 때문에 사실상 주교가 이 지역 성공회 교회를 다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따라서 미네소타 교구에서는 일년에 한 번 견진 및 전입 예식 예정자와 가족, 친지 및 교회 구성원들을 주교좌성당으로 초청하여 한 번에 예식을 진행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반적인 감사 성찬례와 동일하지만 설교와 평화의 인사 사이에 견진 및 전입 예정자 추천, 세례 서약의 갱신, 그리고 주교의 안수 기도 과정이 추가되었다. 미네소타 교구의 주교인 Brian Prior는 오늘 설교 때 세례 서약의 갱신을 다시 읊으며 '정말? 당신들 제정신이야?' 라는 뉘앙스로 견진 및 전입 예정자들에게 질문을 날렸는데 곱씹어 생각해보면 사실 이 세례 서약시 묻는 다섯 가지 질문은 범상치 않은 것들이다:

  1.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 성찬과 기도의 삶을 지속하겠습니까?
  2. 죄악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죄에 빠졌을 때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겠습니까?
  3. 그리스도 안에서 말과 행실로 하느님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4. 이웃을 당신 몸과 같이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구하고 섬기겠습니까?
  5. 모든 사람들 사이의 정의와 평화를 구하고 모든 인류의 존엄성을 존중하겠습니까?
이는 아래의 대한성공회 세례문답의 내용과 흡사하다.
  1.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고 그 가르침을 지키겠습니까? 
  2. 그대는 감사성찬례를 통하여 말씀과 성사의 은총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섬기겠습니까? 
  3. 그대는 악을 꾸준히 물리치고, 죄에 빠졌을 때마다 곧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겠습니까? 
  4. 그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과 행위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겠습니까? 
  5. 그대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섬기겠습니까? 
  6. 그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힘쓰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겠습니까?

사실 이 대여섯가지의 질문에 힘차게 답하긴 하지만 실제로 이 모든 질문에 '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I will, with God's Help.)' 라고 답하려면 굉장한 작심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관찰해보면 도무지 합당하게 사는 사람들이 없어보일 정도로 이 질문들은 사실 굉장히 과격하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렇게 하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희생을 하늘에서 지켜보신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 후에 우리에게 내려주신 성령의 뜨거운 탄식과 간구가 거저 받은 칭의과 구원의 은총을 끝까지 확증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의 견인 교리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해서는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내 안수기도 차례가 되었고, 앞에 나가서 나지막이 'Sung-Soo for Confirmation'이라고 주교에게 귓속말로 얘기하자 동양인 이름이 어색한지 내게 '성수?'라고 나지막이 되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Yes.'라고 말하자 이윽고 '성수를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선언한 뒤 머리에 손을 얹고 성령 청원의 기도를 하시며 이마에 십자가를 그어주셨다. 견진의 의미대로 공식적으로 성공회 교인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굉장히 벅찬 감정이 끓어오르는 순간이었다. 함께 참석해주신 신부님과 부제님, 그리고 교인 여러 분들이 축하의 인사를 전해주셨고 연신 'Thank you'를 연발하고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나누었다. 교회 깃발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중에는 제대 쪽에 가서 주교님, 신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http://fluorf.net/album/bio_postdoc.htm 10번 사진)


내 짧은 기독교 인생을 간략하게 묘사하자면 어릴 때 선물로 받은 튤립(TULIP)을 영국식 화단에 심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비유적으로 칼뱅의 개혁주의(Calvinism)와 성공회 신앙(Anglicanism)이 내 기독교 신앙을 떠받드는 두 거대한 기둥임을 말한다. 그런데 고작 30년을 살았을 뿐이며 (바라옵기는) 살 날이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바 이후의 신앙 여정이 어떤 풍파를 만나 흔들리게 될 것인지, 내 믿음의 어떤 부분이 소리 소문 없이 닳아버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어떤 또 거대한 기둥이 나타나 스러져가는 신앙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복귀시킬 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겠다. 결국 세례든, 견진이든 어떤 목표나 시작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시 인생의 긴 신앙 여행의 중간에 놓여 있는 점들에 불과한 것이니 사람은 단지 겸허하게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이치를 구하며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니 이 여정이 끝나는 날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리라.


오늘의 견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내 신앙은 내가 개척하며 내가 가꾸어 나가는 독립적인 것이 되었으니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지켜나가며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