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여기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내가 현재 맡고 있는 미 과학연구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과제를 얼마 뒤엔 여기 실험실의 1년차 대학원생이 맡아서 결과를 내야 한다. 그런데 신출내기는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과제가 어떤 내용인지 익히게 할 겸, 연구를 위해 사용해야 할 다양한 실험 기기들의 사용법을 학습시킬 겸 현재 내가 이 과제에 맞추어 하고 있던 연구를 이 친구와 함께 진행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이는 이전에 함께 연구했던 학부생들에게 적용한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먼저 대학원생이든 학부생이든 무조건 학생과 함께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일일이 반복하면서 재현되는 것을 확인한다. 이 학생과도 첫 두달간은 합성, 광가교 과정과 인장강도(印章剛度) 테스트, 그리고 적외선 분광 측정 등등 무슨 실험을 하든 무슨 측정을 하든 먼저 함께 진행할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해당 시간에 만나서 함께 모든 것들을 진행했다.


그런데 대학원생과 학부생 실험 교육의 분기(分岐)가 일어나는 시점은 그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이후부터이다. 참고로 '어느 정도'의 기준은 내 참여 없이도 그가 홀로 진행한 실험들이 재현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인데, 학부생의 경우 그냥 거기서 일이 끝나게 되지만 ― 어차피 학부생의 실험참여 시간은 주당 몇 시간 정도로 굉장히 제한적이므로 일이 끝나지도 못한 채 학부생과 이별하는 경우가 잦다. ― 대학원생의 경우는 이와 달리 그 시점에서 내가 해보지 않은 중요한 일을 과제로 던져 준다. 예를 들어 이 학생에게는 광가교에 활용하는 동일한 재료를 가지고 전기방사(電氣紡絲, electrospinning)를 진행하게 하였다. 물론 나는 다른 재료를 이용하여 전기방사를 진행해 본적이 있으나 현재 프로젝트에서 사용하는 물질로는 일절 해본 적이 없다. 전기방사가 진행되어야 할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이 일이 성공할 지 아니면 실패할 지는 나도 모른다. 오직 네 실험 결과에 따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건네면 도전 과제 입력 끝.


처음에는 이 학생으로부터 '전혀 가망이 없는' 실험 결과들만 보고되었다. 뭐 대충 예상은 했다. 왜냐하면 현재 사용하는 단량체 시스템은 이전에 보고된 것보다 속도론적으로 훨씬 느리기 때문에 전기방사가 생각보다 쉽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것을 그나 나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여기 실험실에서 출판된 이전 논문들을 세심히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내가 이전에 진행했던 전기방사 실험 결과도 간간히 소개해 주었다.


잠깐,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너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까지 너무 참견을 하면 학생의 성취감은 반감될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진다. 게다가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당사자는 대학원생이므로 그가 나보다 더 많은 경험과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어야' 한다. 교수님이 대학원생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사람(advisor)이라면 나는 대학원생의 실험을 감독하는 사람(overseer)이자 조력자(helper)이다. 그런데 지도교수나 감독이나 조력자는 실무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해당 실험의 모든 공로는 일선(一線)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대학원생에게 돌려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 이 학생은 계속된 실패에도 헛삽을 파지 않고 과감히 실험 조건들을 바꿔가며 다양한 실험들을 굉장히 밀도 있게 진행하였다. 물론 '네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가끔씩 별 일이 없어도 그 실험실에 한번씩 들르기도 하고.


그리고 한 2주 정도 지났나. 지난주 금요일에 이 실험실에서 과거에 출판된 실험 결과와 굉장히 유사한 결과를 얻는 데 성공했고, 만일 우리가 이 결과를 기반으로 여러 인자(因子)들을 바꾸면 우리가 원하는 섬유 방사가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그 대학원생에게 해당 결과를 담은 현미경 사진을 지도교수에게 보냄으로써 '현재 내가 이런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기술을 온전히 습득했다'는 사실을 내비칠 것을 조언했고, 오늘 아침에 대학원생의 성과를 칭찬하는 지도교수의 답신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이 일을 통해 성취감을 얻고자하는 만큼  나와 함께 일을 하는 공동연구자 역시 그러한 기대감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같은 대학원생 처지라면 내가 한 일이 더욱 돋보일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이 대학원생이 더 나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입장에 있는 박사후연구원이 아닌가. 따라서 내가 진행하는 게 어찌보면 더 빠르고 효율적일 수 있을지라도 참고 믿어주면서 대학원생이 스스로 무언가를 진행하여 성취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편이 결과적으로는 더 낫다. 그리고 현재 이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이 연구가 논문으로 쓰여진다면 저자 목록 중에는 이 대학원생의 이름이 앞쪽에 와야할 것이다. 나는 이 대학원생과 공동1저자로 명기되어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그 정도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보상이 합당하게 매겨져야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은 다른 연구실과의 공동 연구이고, 저자에 관한 일은 지도교수들의 최종 재가(裁可)가 있어야 하지만 언젠가는 건의해 볼 생각이다.


그런데 잠깐. 그렇게 교육한 대학원생이 기고만장(氣高萬丈)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럴 확률은 굉장히 드물지만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거기에 대해서는 분개(憤慨)해 하거나 따끔하게 일침(一鍼)을 날려주려고 기회를 엿볼 필요가 전혀 없다. 이들은 나보다 10여년 정도 어린 친구들이지 않은가. 10년 정도 지나면 그 때 자기가 얼마나 철없었는 지를 알게 될테고, 동시에 그것을 부드럽게 받아 준 내게 새삼 경탄(驚歎)하게 될테니 말이다. 애들과 싸울 필요는 없지 ― 그것이면 되지 않은가?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