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옛날, 미래를 예견하고 현재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신(神)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는데 한낱 인간이 그런 대단한 일들을 언제나 제대로 맡아 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영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는 없었던 것이 당연지사.


그런데 근래 몇년간 시끌벅적하게 회자되는 4차 산업 혁명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면 요즘 그 신이 꼭 지극히 물질적이고도 과학적인 인공지능(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형태로 현세(現世)에 강림(降臨)한 것만 같다. 고도로 발달된 기술이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우리의 필요를 알아서 제시해주는 것을 넘어서 실현시켜 주니까 말이다. 스마트 팩토리, 실시간 고객 맞춤형 정보 제공,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등등이 바꿔놓은 현대 산업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인공지능은 이제 막 구현되기 시작한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2년 전에 많은 사람들이 구글이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는데, 이 사람들이 지금 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 혁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충격을 넘어 아예 한동안 기절할는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보니 어떻게 보면 영적인 신보다 우리 삶을 물질적인 것들을 효과적으로 채워준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이 더 환영받을 만한 신적 존재로 여겨진다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신(現身)의 기적을 일으킨 4차 산업 혁명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는 그 사건으로부터 산출된 단물을 맛보는 이들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강의를 가만히 듣다보니 드는 생각은 과연 이랬다: 훗날에는 시장을 압도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소수만이 살아 남아 세상을 이끄는 한편,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잉여(剩餘) 인적 자원으로 취급되어 그저 독점된 권력이 나누어주는 복지 혜택과 약간의 쾌락만을 배급(配給)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경쟁력이 없는 이들은 도태되고 소외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 속에 많은 이들이 과학 문명에 예속된 채 직업도 없이, 꿈도 없이, 단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그런 노예적 감성에 매몰되어 살기를 강요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첨언하자면, 소확행을 추구하는 누군가의 삶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소확행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설파하며 보다 큰 행복을 쟁취하려는 청년들의 대담한 마음을 조기에 꺾어버리려는 사조에 대해서는 맹비난을 퍼부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미래 세대에게 영적인 신과 그를 논하는 종교(宗敎)는 더 의미있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물질적인 전지전능한 신이 등장하여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그런 개념들은 모두 퇴물(退物)이 되어버린 것 아니냐고? 우리는 과학기술을 통해 '어떻게 잘' 살아야하는지를 끊임없이 궁구했지만, 정작 '왜' 그리고 '뭘 위해 잘'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종교는 거대한 시스템의 불필요한 부속품으로 취급되어 빛을 잃어버리고 만 시민들에게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것인지를 가르칠 인도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현대 사회의 어떤 점이 잘못된 것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해 줄 예언자적 소임까지도 충실히 이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에 임한 구원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인지 끊임없이 답을 찾게 할 것이다.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고 고갈시키는 인류에 절멸(絶滅)이라는 계산 결과를 내놓을지언정, 자신의 아들을 내어줄 인공지능은 없을 것이다. 한편, 더 있어봐야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안 될 인류에게 살 이유를 제시하는 종교를 품어줄 인정 많은 인공지능은 없겠지만, 종교는 그러한 인공지능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인가를 제시해 줄 만큼의 포용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이 만능인 미래 시대에 오히려 종교의 절대자는 그 찬란한 과학 문명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고, 여전히 모든 것의 창조주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전혀 그래야 할 필요가 명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 ㅡ 이것이야말로 형체가 없는 정보 사회의 전지전능함 이면에 감춰진 무능함을 뛰어넘는 신령한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지이리라.


그러므로 과연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에서 고백했듯이 신은 전능한(παντοκρατωρ, omnipotent) 분이며 유형(ορατος, visible)과 무형(αορατος, invisible)의 것들을 창조한 자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공의회가 소집된 지 거의 1,700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교부(敎父)들이 내린 이 결론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다시 곱씹어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신규입사자 교육 중에 든 짤막한 생각을 정리하여 올린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