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자학회 봄 학술대회는 항상 대전에서 열렸는데, 올해는 희한하게 부산 컨벤션센터인 벡스코(BEXCO)에서 개최되었다. KIST 전북분원이 있는 완주군에서는 서울보다 부산이 더 먼 곳에 위치하는 관계로 아침부터 헐레벌떡 부산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어야했다. 과제 관련 업무 때문에 출발 직전 오피스에 들러 관련 자료들을 갈무리하고 센터장 박사님께 전송해야 하는 등 정신 없이 아침을 시작했다는 것은 여기서만 밝히는 비밀이다.


오랜만에 도착한 부산은 흐리고 바람이 매섭게 불어 춥다는 느낌마저 들었지만, 눈부시게 발전한 센텀시티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멋들어진 신도시가 들어섰지? 하긴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은 2005년 연말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내게 사실 부산은 외할아버지 댁이 있던 연산동 어드메, 허심청과 몇몇 해수욕장이 전부였고, 학부 이후에 부산은 항상 진해에 있는 할머니 댁에 방문하기 전에 거치는 부산역,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지하철역 하단역이 전부였다. 센텀시티라니, 해동용궁사라니, 해운대의 고층 빌딩이라니, 이 모든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박제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건만 세상에... 부산은 너무나도 변해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그야말로 딱 들어맞았다.


아무튼 놀라움과 감개무량(感慨無量)함이 뒤섞인 채 학회장에 들어선 나. 오랜만에 뵙는 얼굴들이 있어 인사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대학원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박사과정 말기에는 '고분자학회도 이젠 참 식상하지...'라고 혀를 끌끌 찼었는데, 오늘따라 모든 연구 주제들이 재미있어 보이고, 또 새로운 것을 알게 된 느낌마저 들었다. 새로 시작하는 연구원의 마음가짐이라서 모든 것이 다 리셋(reset)된 것인가? 혹은 고분자과학에서는 조금 멀어진 복합재료연구소 탄소융합소재연구센터의 연구원이 되어 좀 더 멀찍이서 이 연구 세계를 조망(眺望)할 수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강연을 듣는 도중에 연구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 이미 머릿속으로는 논문을 다 썼다! 아, 어쩌면 어른들도 이런 기분 때문에 학회를 찾는 것이 아닐까? 새로고침(refresh)이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학회 강연 마지막 세션을 남겨두고 벡스코를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에 내려 예약한 이비스 앰버서더 해운대 호텔로 향했다. 해운대 근처에는 이미 말끔한 시가지가 형성되어 관광객들을을 맞이하고 있었고, 곳곳에는 높은 키를 자랑하는 빌딩들이 내가 더 바다를 더 잘 바라볼 것이고 경쟁하는 듯이 서 있었다. 당장 내가 묵게 될 호텔도 비지니스 호텔이지만 무려 20층짜리였다. 체크인을 하고 14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섰는데, 오! 좁은 창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내일 아침에는 해변을 잠깐 거닐어 봐야지.


체크인을 해놓고 짐을 풀어놓은 뒤, 정신없이 과제 관련해서 오간 메일들을 갈무리하고나서 다시 학회장으로 향했다. 벡스코 근처 컨벤션/웨딩홀 장소를 통째로 빌려 진행된 고분자학회 총회는 그런대로 볼만했고, 2022 미국 재료화학회(MRS, Materials Research Society) 봄 학술대회가 애리조나(Arizona)의 피닉스(Phoenix)가 아닌 하와이(Hawaii)에서 진행될 거라는 아주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2022년 봄 MRS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농담을 주변 박사님들과 나누었다.


총회 후에 이어진 간친회에 제공된 음식은 더할나위없이 훌륭했다. 내 자리 옆에는 최근에 KU-KIST 융합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긴 학부 선배인 김용주 박사님이 앉아 있었고, 서로를 알아본 우리 둘은 소스라치게 서로 놀랐다. 다시한 번 느꼈지만 이쪽 세계는 참 좁다. 알고보니 저쪽 너머에는 현 고분자학회 회장이신 차국헌 교수님의 제자이자 IRTG 등의 연구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이 익었던 우상혁 박사님도 계셨고, 인사는 못했지만 박사과정 초기에 태양전지 관련 연구로 협업을 진행했던 박사님들도 자리에 계셨다. 아, 서울대학교의 최태림 교수님도 뵈었다 ― 내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셨는지, 혹은 모르는 척 하신 건지는 몰라도 굉장히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사실 고분자학회는 내 고향같은 국내학회이지만 현재로서는 이 학회에 진력(盡力)하기에는 다소 애매해졌다. 왜냐하면 내 소속은 엄연히 탄소융합소재연구센터이므로 내가 더 공을 들여야 할 연구분야는 '고분자재료'보다는 '탄소재료'이기 때문다. 물론 세상 고분자를 구성하는 원소 대부분이 탄소지만, 정말 그런식으로 생각했다면 고분자학회와 탄소학학회가 따로 있지 않았으리라. 물론 내가 탄소연구만 하고 고분자연구를 전연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두 분야를 동시에 섭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복합재료연구소 탄소융합소재연구센터에 일할 것을 명받은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 내가 이곳에서 맡은 소임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는 셈이다. 최근에 분원장님과의 미팅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지만, 나는 어쨌든 복합재료에 잘 사용될 수 있는 탄소재료를 잘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분자학회 참석은 일종의 외유(外遊)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부산행은 연구에 대한 열의, 내가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연구에 대한 방향을 생각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이런 유익한 외유는 권장할 만하지 않은가! 내일 학회 일정 중에는 또 어떤 바람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칠지 기대가 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