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도쿄(東京)에 다녀왔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양일간 제주에서 탄소클러스터산업조성사업단 춘계워크샵이 있었고, 금요일 이른 오후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일찌감치 도착한 나는 톨스토이(Толстой)의 소설 부활(Воскресение)을 읽으면서 일본항공의 하네다(羽田)행 저녁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롭게 단장한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만큼이나 국제선 청사 역시 깔끔하게 새단장을 했는데, 면세 구역 내에 먹을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어서 다소 아쉬웠다. (물론 놀랍게도 일본항공 비행편에 기내식이 포함되어 있어서 굳이 사먹지 않아도 되는 거였음을 깨달은 것은 비행기 탑승 후 정확히 30분 뒤였다.)


도쿄에 가게 된 계기는 순전히 용석이 때문이었다. 2월 어느날 내 이 절친은 일하기가 싫은 날이라며 단체 카톡방에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그의 푸념에 나는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양 가고 싶은 여행지 목록을 늘어넣고 있었는데, 그 불은 전이(轉移)되어 내 집도 활활 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참지 못하고 도쿄로 4월 어느 좋은 주말을 잡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제주항공을 통해 그는 인천공항에서, 나는 무안공항에서 4월 19일에 출발하는 비행편을 예약했다.


문제는 아까 언급했던 사업단 워크샵이 4월 19일까지 제주도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3월 초순에 난데 없이 확정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청천벽력(晴天霹靂)과도 같은 소식에 급히 비행편을 알아보았지만 이게 왠걸, 금요일 제주발(發) 도쿄행 비행기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제주도는 일본인들에게 매력적인 관광지가 아닌 것일까 싶었다. 아무튼 나는 급히 예약한 일정을 취소하고 머리를 이리 저리 굴리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이 삼다도(三多島)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김포로 올라온 뒤 거기서 맞바로 하네다로 향하는 비행기를 찾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낙점된 것이 일본항공의 저녁 비행기. 비행기 삯이 제주항공의 1.5배에 달하였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금요일 밤에 도쿄에 닿을 수 있었고, 입국 심사를 마친 뒤 짐을 챙겨들고 곧장 게이큐(京急) 전철과 아사쿠사(浅草)선, 그리고 히비야(日比谷)선을 거쳐 쓰키지(築地)에 위치한 호텔에 드디어 체크인을 했다. 방에 들어갔을 땐 오전부터 격한 쇼핑과 관광에 지친 용석이가 누워 자고 있었고, 나는 그를 깨워낸 뒤 저녁과 함께 일본 맥주를 마시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새벽 두세시까지 호텔 근처 스시집 및 이자카야집에서 먹고 마신 뒤 하룻밤을 보내고, 토요일은 아주 열심히 돌아다녔다. 쓰키지장외시장(築地場外市場)에서 니혼슈(日本酒)와 함께 아침을 먹고, 온갖 군것질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에 있는 센소지(浅草寺)에 갔고, 용석이의 추천에 따라 함박스테이크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롯폰기(六本木)에 있는 블루 보틀(Blue Bottle)이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우리는 방향을 틀어 오다이바(お台場)에 있는 대관람차(大観覧車)에 몸을 실었고, 해변공원(海浜公園)에 앉아 바다 너머로 지는 태양으로 인해 거뭇거뭇하게 드러난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자(銀座)에서 이것저것 샀다가 다시 롯폰기로 돌아온 우리는 역시 용석이의 추천에 따라 미쉐린 가이드에도 소개되었다는 돈가스 집에 가서 1시간 반이나 기다린 끝에 부드러운 로스/히레가스를 위에 채워넣을 수 있었다 ― 물론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적성에 안 맞는 우리들은 이날의 선택을 죽도록 후회하다가 적당히 '기다릴 만 했다'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휘황찬란한 롯폰기를 이대로 떠나기 아쉬워 롯폰기힐스 주변을 서성거리던 우리는 꽤나 부촌(富村)인 것으로 여겨지던 아자부주반(麻布十番)쪽으로 걸어가다가 뜬금없이 발견한 바에 충동적으로 올라갔다. 거기는 바 사장님이 시가도 팔고 주류도 파는 조용하고 작은 바였는데, 맥칼란(Macallan)이라는 브랜드의 위스키가 연도별로 빼곡하게 장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홈 바(home bar)를 꿈꾸는 용석이의 계략(?)에 휘말려 이런 바에 들어와서 분수에도 안 맞게 마티니(Martini) 한 잔과 ―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마셨다. 그처럼 ― 맥칼란 18년짜리 한 잔을 온더록(on the rock)으로 마셨다. 이 술 두 잔이 아까 우리 둘이 먹은 미쉐린 맛집의 돈가스보다 훨씬 비싼 것은 비밀. 자정 즈음까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우리는 지하철이 끊겼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으며, 결국 롯폰기에서 쓰키지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용석이 왈 '도쿄에서 해 볼 건 다 해보고 가네.'


숙소에서 긴 하루의 여독을 푼 우리는 다음날 아침 우에노(上野) 공원을 한 번 둘러본 뒤 작별인사를 했다. 용석이의 귀국 비행기는 일요일 이른 오후였기 때문. 나는 바로 신주쿠(新宿)에 갔는데,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 깜짝 놀랐다. 동생이 특별히 부탁한 토끼 주걱을 사고 나서 주변 카레 우동 전문점에서 밥을 먹은 나는 점원의 '감사합니다.'라는 인삿말에 깜짝 놀란 마음을 다스린 채 디스크 유니언(Disk Union)으로 향했다. 거기 3층은 재즈 음반만 즐비한 층이었는데 거의 거기서 1시간을 보내며 아주 즐거워했다. 빌 에반스(Bill Evans)와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연주했던 곡들이 새롭게 변주되어 귓가를 간지럽혔고, 그 음악에 황홀해 하면서도 나는 사고 싶은 앨범을 찾아 부지런히 이 선반, 저 선반을 오갔다. 빌 에반스의 앨범을 석 장 더 사고, 미국에 있으면서 인상깊었던 재즈 아티스트인 사이러스 체스트넛(Cyrus Chestnut)과 레지나 카터(Regina Carter)의 앨범, 그리고 언젠가는 꼭 사고 싶었던 오넷 콜맨(Ornett Coleman)과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의 앨범을 골랐다. 물론 거기에 더해 몇 개의 앨범을 더 샀는데, 그렇게 골라보니 총 11장의 앨범이 손에 쥐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다 합쳐도 9,000엔이 채 되지 않은, 즉 우리 돈으로 1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신나게 쇼핑을 마친 나는 그길로 지하철을 타고 쓰키시마(月島)로 향했고, 거기에서 성공회 교회를 이끄시는 지성희 신부님을 만났다. 3시에 이곳 쓰키시마 교회에서 한국어로 감사성찬례가 진행된다는 안내문만 보고 간 것이었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마침 이날이 부활절(復活節)이었기에 오늘 이 교회에서는 10시 반에 일본인 교인들과 함께 합동 감사성찬례를 드리고 오늘 3시 성찬례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전해 듣게 되었다. 대신 지성희 신부님 내외분은 내게 차를 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셨고, 따뜻한 환대와 함께 주일을 지키려 했던 그 마음 자체를 하느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라는 덕담도 들었다. 재미있게도 지성희 신부님은 현재 안양교회 관할사제인 이수상 신부님과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었던 분으로 내가 태어날 당시 상계동에서 나눔의 집 야학을 하실 때 동역했던 사역자였다고 했다. 허 참, 세상 좁구만!


그길로 나는 호텔에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다. 더이상 어디를 들르기도, 무엇을 사기도 애매한 시간이 되었으니 차라리 공항에 가서 여유롭게 비행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어느새 너무나도 익숙해진 도쿄의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 도착한 나는 출국할 때와 마찬가지로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며 비행기를 기다렸고, 거기서 밤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거의 2시간여를 기다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새벽 2시 반이 다 되어서야 익산에 도착했다. KIST 기숙사에 들어와 씻고 자리에 누운 것이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각 ― 굉장히 도전적인 여행 일정이었다.


나는 이 여행이 굉장히 좋았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언어는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역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국인이 제일 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한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좋든 싫든, 우리의 역사는 일본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가 이미 일본의 그것들과 깊히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비록 만 이틀간의 짧은 일정이었으나 그 사실을 집약적(集約的)으로 다시 깨닫기에는 충분했던 그런 여행이었다. 과거의 일본을 보려면 교토(京都)나 나라(奈良)를 가야겠지만, 역시 한 나라의 정수(精髓)는 그 나라의 수도(首都)에서 맛볼 수 있는 법. 물론 함께 여행한 용석이가 그러한 고찰과 발견에 대해 깊이 공감해주고 또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말할 줄 아는 이였기에 그러한 여행의 인상이 배가(倍加)되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한편, 주말에 외국을 방문하여 여행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자주 또 편하게 여행할 수는  없겠지만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이렇게 짧게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휴식과 재충전, 그리고 또다른 배움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 추천할 게 하나 급히 떠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Mary Poppins Returns)'를 봤는데 정말 좋았다. 아무튼, 다시 또 도쿄를 방문할 기회가 오길 기대하며!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