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홈페이지를 통해 출판사 '보누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열선비의 화학이야기' 유튜브 채널을 보신 출판사 관계자 분이 채널에 등록된 영상과 관련된 주제 ㅡ 화학 원소들의 이름과 그 어원,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부르는 이름들의 문화적 배경 등 ㅡ 를 중심으로 책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던 것이다. 당시 33번 원소인 비소(As)까지 작업을 마친 내게는 글감이 충분했고, 어차피 당장 원고를 보내는 것이 아닌 이상 주어진 기한 내에 더 살을 붙여 내용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것을 즐겨하던 내게 이것은 무척 좋은 제안이었다. 


다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정부출연연구소이기에 과학 관련된 내용으로 수익을 창출하게 되면 이해충돌방지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었고, 또 이것은 직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이 아니기에 타업행위로 처리되는데 이게 과연 인정될 만한 성격의 일인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인사경영팀을 통해 부원장님까지 올라가는 길고 긴 자문 및 검토를 거친 끝에 이 일은 수락되었고, 올해 1월에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원고 작성을 시작했다.


3월이 지나가기 전 초고를 완성했고, 그 후 거의 5달에 걸친 기나긴 증보 및 수정을 거쳐 9월 초에야 최종본이 나왔다. 이 작업은 마치 논문 작업과도 같았다. 논문 초안을 투고하고 동료평가(peer-review)를 받은 뒤 수정안을 재투고하고, 최종 교정쇄(proof)를 확인하는 작업은 수십 번도 더 했다. 하지만 200쪽이 넘는 국문(國文) 원고를 작성한 뒤 고치고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로 대한민국에서 책을 쓰시는 수많은 작가들의 노력과 고생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수정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특정 단어와 문장 형태, 표현 방식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문제이기에 어떻게 고치는 것이 나은지를 아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출간된 책의 이름은, 『읽자마자 ~~가 보이는 ~~ 사전』이라는 보누스 출판사 교양 서적 기획의 한 요소로서, 『읽자마자 과학의 역사가 보이는 원소어원사전』이라고 지어졌다. 머리말에서도 밝혔지만, 이 책은 대중과학교양서로서 무슨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내용을 선보이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독자들은 피터 위더스의 『원소의 이름』을 위시한, 원소 이름을 다루던 기존 화학 교양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문에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에는 이미 이러한 책들이 기존에 출판된 바 있으므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지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사 측에서는 기존에 출판된 책들이 널리 읽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좀 더 쉽게 학생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출판 의도를 알려주시면서, 내 이야기 방식이 기존 서적의 서술 방향과는 충분히 다르게 인식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를 상기하면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는 학생들이 좀 더 친숙하게 읽을 수 있도록 책의 구성을 짜 보았고, 내용 전개와 표현을 기존과는 다르게 해 보았다. 이를테면 철저히 우리말 원소 이름에 초점을 맞추어, 


1) 순우리말 이름

2) 한자어 이름

3) 본래 한자어 이름으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외래어로 부르는 이름

4) 외래어 이름


의 순서로 구성을 했고, 이 순서에 맞게끔 원소들을 나열하고 되도록이면 같은 주제 하에 묶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편집자의 의도대로 각 원소당 2 혹은 4 페이지 정도의 글이 나오게끔 조절하되 유튜브 영상에서 다루는 좀 복잡하거나 하드코어한(?) 어원 관련 내용은 지양하면서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화학교양서는 해외 저자의 글을 번역하거나 현직에서 일하시는 관련 학과 교수님들의 글인데, 전자의 경우 우리말이나 한자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아쉬웠고, 후자의 경우 화학 관련된 내용은 풍부하지만 이름 관련된 배경 이야기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게 아쉬웠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외국인도 아니면서 대학 교수도 아니었기에 이런 틈새 시장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뭔가 기존 책과 비슷하긴 한데 다르긴 다르다.'라는 의견을 듣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대학원 시절에 『동서교회의 대분열』이라는 책을 교보문고 Pubple 서비스를 통해 자비 출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출판사와 연계한 기획 출판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나도 제대로 된 저서(著書)를 갖게 된 셈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가 돌이켜보면, 누군가에게는 기이하고 별난 행동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을 통해 글을 쓰고, 유튜브를 통해 제작한 영상을 공유하는 행동을 별다른 욕심 없이 꾸준히 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게 사실은, 돌이켜보면 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공간이, 이 공간에 하나하나 써 내려간 활자들이, 그리고 유튜브 영상들이 다 소중하고 고마울 뿐이다.


나를 포함하여, 이 책이 무슨 대박을 터뜨려서 수많은 경제적인 부(富)를 창출해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이 책의 출간은 문자 그대로 내 인생에서 역사적인(historic) 한 장면을 장식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출판업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산업의 생산물의 시작과 끝을 직접 경험해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는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다. 비록 대학원 입학 이후로 여러 국제 학술지에 몇 십 편의 논문을 출간하긴 했지만, 그 학술지에 실린 논문보다 어쩌면 이 책이 화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피부로 와 닿는 도움과 유용함으로 인식될 지도 모르겠다. 부디 누군가에게는 알고 싶었던 내용을 알려주는 책으로서, 그리고 더 알고 싶은 내용이 많아지게 해 주는 책으로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