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므로 당분간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오늘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일어났는데, 다시 자기는 그른 것 같아 일단 핸드폰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최근에 구입한 책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소설 『인간실격(人間失格)』을 마저 다 읽었다.


소설의 화자(혹은 저자)에게 공감하기 무척 힘들었지만,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충격적이고 또 가련하기까지 했다. 읽는 동안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 느꼈던 기묘한 감정을 느꼈으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의 느낌은 또 그때와는 달랐다. 이게 단순한 중2병같은 그런 읊조림은 아니었기 때문일 테다.


사실 이 책을 왜 구매했는지 나로서는 지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를 이전에 들어본 적도 없었고, 또 뒤늦은 고백이지만 이 소설은 내가 처음 읽어보는 일본 소설 작품이다. 나는 그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라든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라든지 그런 유명한 일본 소설가의 작품을 접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다자이 오사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아니다. 그랬는데 나는 왜 이 책을 서가에서 골랐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인간실격이라는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보통 실격은 스포츠 경기에서 부정 출발 혹은 반칙으로 인한 실격(disqualification)을 말할 때나 입에 올리는 단어인데, 앞에 '인간'이라는 단어를 붙이니 단어가 왜 그리도 충격적이고 생동감있게 다가오던지. 이 어찌나 끔찍한 현상의 표현인가, 인간으로서 실격되었다니 말이다!


책 내용은 음울하기 짝이 없고, 이해되지 않는 화자(혹은 저자)의 기행(奇行)들로 가득하다.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화자(혹은 저자)의 삶은 실패자의 삶,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함량 미달인 존재의 발자취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도 이와 같이 자신을 방어하고 또 삶을 반추한다. 화자(혹은 저자)가 쓴 수기의 첫 문장이 '부끄러움이 많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 마지막 문장에서 그를 추억하는 마담의 회고가 '하느님처럼 착한 아이였다'는 것이었는데, 과연 수치(羞恥)를 아는 하느님처럼 착한 아이가 인간실격이라는 단어와 상존할 수 있는 것인가.


출장보고서 작성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끄적여 본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