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교회들은 왜 있는 거고, 저 종소리와 저런 가식은 다 뭐지? 저기 포악하게 욕을 해대는 마부들처럼 우리 서로가 모두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일 뿐이야. 야시빈이 말했지. 그도 자길 남김없이 벗겨 먹으려 하고, 자기 역시 그렇다고. 바로 그게 진실이야!


레프 톨스토이(Лев Толстой)의 역작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에서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에서 주인공인 안나의 독백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요즘같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온갖 이슈들이 난무하고 있는 때, 곧 인간에 대한 사랑과 소망이 사그라드는 때에 불현듯 마음에 꽂힌 안나의 대담한 결론은 나로 하여금 인간 사회를 서로간의 혐오라는 주제로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10년 중후반에 이르러 혐오라는 단어가 광장과 지면을 덮고 있다.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개식용혐오, 외국인혐오 등등 웬만한 단어에 혐오를 붙이게 되면 그것이 곧 요즘 핫한 뉴스거리가 되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특히 미투운동으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여성혐오 반대 운동은 나같이 여성인권에 큰 관심을 두고 살아오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완경이라느니 포궁이라느니 새롭게 고쳐진 단어들과 더불어 미소지니(misogyny)라는 고급 영단어 어휘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영단어를 확실하게 익히게 해 주었다. 각종 사회적 운동과 논의를 거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는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혐오를 드러내는 행동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하는 것이 권장될만한 것이라는 데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로 규제되거나 강제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바른 시민 교육을 통해서라야만 거기에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면, 받아들이기는 껄끄러운 것이라해도 그것은 혐오가 사람의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정서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지가 아닐까.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인성에 내재된 사회성은 사회의 일부분으로 협력하며 살아가기엔 심히 미약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의 이익을 쟁취하는 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타인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는 위협과 경쟁의 대상으로서 혐오스러운 존재로 내 주변에 위치하게 되지만, 만일 협력을 통해 각자의 이익을 조금 더 극대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탄생인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구성되어 살아간다 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인 혐오는 인간 고유의 내재적 속성이기에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혐오의 감정은 사회의 결속력을 저해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물론, 사회를 구성함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상호 이익의 증대를 심각하게 약화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는 것이 필요했기에 윤리를 도입했고, 그 최소한인 법을 적용함으로서 사회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를 통해 사회는 유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DNA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혐오의 정서를 발본색원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혐오의 굴레에 익숙하면서도, 또 이 원리가 작동하는데 큰 기여를 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여기서 벗어나고자하는 욕망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남을 혐오하는 것은 괜찮지만 내가 남에게서 혐오를 받는 것은 끔찍하게도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혐오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나는 그 반대의 개념인 사랑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혐오와 사랑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지만 이들은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불신과 증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혐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랑을 갈구하게 하였고, 이는 지긋지긋한 인간사회의 혐오로부터의 구원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절대적이거나 영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사랑은 혐오로 종결된다. 혐오에 끝에 사랑이, 사랑의 끝에 혐오가 마주하는 이 상황은 마치 빛의 끝에 어둠이, 어둠의 끝에 빛이 마주하는 밤낮의 순환과도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이라는 기본적 바탕 위에 빛이라는 물리적, 철학적 존재가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 역시 혐오라는 기본적인 인간 감정 위에 사랑이라는 개념이 덧씌워지는 것이리라 ㅡ 마치 어둠이 가득했던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듯이.


그렇다면 고대 근동의 헤브라이 사람들을 비롯한 어떤 이들은 '믿을 놈 하나 없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사는 사회,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사회의 지긋지긋한 혐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서 '신'이라는 존재를 구현한 것이 아닐까. 신은 혐오와는 거리가 먼 사랑의 결정체이며 언제나 그를 믿는 나, 더 나아가 우리와 함께 하는 절대자이다.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인간은 이렇게 주체로서 신이라는 객체를 창조했음에도 기꺼이 주객을 전도시킴으로써 절대자이자 사랑 그 자체인 신이 우리를 창조했으며 우리는 그의 보살핌과 사랑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노예적인 종속, 인간의 상실이라고 비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로 믿게 된 허구적 상상을 통해 큰 위로를 받고, 개인의 삶에서 불가능했던 일을 해낼 수 있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더 잘 성취될 수 있도록 사회를 개조시키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혐오가 사랑으로 완성되는 고귀한 과정 아닐까.


기독교적 신론이 없는 사회에서는 혐오와 사랑은 무한히 반복되며 기껏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영겁의 굴레에서 수행을 통해 스스로 벗어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 이 무한 반복되는 혐오와 사랑의 순환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끝났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의 반의어가 혐오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와 더불어 '혐오는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다'라는 것 역시 함께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혐오라는 키워드만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이겠지만, 구약의 율법이 약자보호, 인권존중이라는 정신으로 압축이 되고 신약에서 예수가 이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경구로 압축시킨 것을 보면 기독교인으로서 혐오는 내 안에서 말소시켜야 할 성질의 것이 될 것이다. 여성을 혐오하는 것,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것, 노인을 혐오하는 것, 다른 정치논리를 혐오하는 것 모두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더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 노인을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 다른 정치논리를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 역시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 여성(과 남성)을 사랑하는 것, 외국인(과 내국인)을 사랑하는 것, 성 소수자(와 다수자)를 사랑하는 것, 노인(과 젊은이)를 사랑하는 것, 다른 정치논리(와 또다른 정치논리)를 사랑하는 것일 테다. 완전한 사랑의 전파와 함께 수반되는 혐오의 완전한 축출, 그것이 곧 하느님 나라의 확장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어만 할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