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서쪽에는 정읍(井邑)과 고창(高敞)이 있다. 과거에는 정읍시가 교통도 괜찮은 편으로 꽤 큰 도시였지만 인구 유출로 인해 힘을 많이 잃었고, 오히려 비교적 시골이었던 고창군은 다양한 컨텐츠 개발을 통해 관광으로서는 정읍을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고들 한다. 두 지역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 있으며 국회의원 선거구도 정읍시-고창군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번 주말, 해야 할 일들을 잠시 잊은 채 토요일에는 당일치기 관광 목적으로 고창군에, 그리고 오늘 일요일에는 감사성찬례를 드리기 위한 목적 및 점심 쌍화차를 마시기 위해 정읍시에 갔다. 완주군에서 정읍-고창으로 가려면 보통 고속도로를 타야 하지만 고속도로가 아닌 1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가 지방도를 타고 간다 해도 걸리는 시간이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료도로를 통해 두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고창군]


고창군 관광은 충격적으로 매우 좋았다. 이 지역의 관광 컨텐츠는 굉장히 다양할 뿐만 아니라 수준이 괜찮았다.


역사유적으로서는 읍내 중심에 있는 고창읍성(高敞邑城) ㅡ 지역 사람들은 모양성(牟陽城)이라고 하는데 고창의 옛 이름이 모양현이었다고 한다. ㅡ 이 아주 일품이다. 이 성은 산지를 둘러싼 요새인데, 성곽 위를 따라 걷는 느낌이 서울 성곽의 그것과도 다르며 수원 화성의 그것과도 다르다. 고창읍성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고창읍을 둘러싼 산세를 천천히 음미하며 자연속에서 성곽을 걷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특히 남쪽 지역에 이르러서 느껴지는 경관은 장관이다. 또 성내에는 맹종죽이 아주 무성하게 자란 지역이 있는데 아주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다. 담양의 죽녹원(竹綠園) 역시 굉장히 유명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전에 이곳도 꼭 들러볼만한 명소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관광테마로는 상하면에 있는 상하농원이 강추 스팟이다. 매일유업의 우유 브랜드 '상하목장'이 바로 이곳 상하면에 있는 목장에서 따 온 것인데 농원을 굉장히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다. 방목시켜 놓은 소와 양, 염소를 눈앞에서 볼 수 있고, 다양한 동물들을 키우는 축사는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할 만한 교육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농원 가장 윗 지역에 있는 파머스 빌리지(Farmers' Village)라는 숙박시설에서 바라보는 농원의 모습은 참 아름답고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이 모습에 반한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고창에 오게 된다면 여기서 1박을 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참고로 이 지역은 바로 구시포 해수욕장이 있는 서해에 맞닿아 있으니 여름에는 해수욕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을 둘러볼 수 있다. 고창군 부안면에는 서정주의 생가 터와 그의 문학작품 세계를 기리는 문학관을 만들어 놓았는데, 한번쯤 들러 그의 시 세계 감상에 젖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고등학생 때 문학작품을 오직 수능시험 공부를 위해 익혀야 했던 나는 그 당시에는 그가 사용한 시어(詩語)의 아름다움에 대해 숫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시험에서 해방된 지금 다시 그의 시구를 천천히 음미하니 그 어휘력과 감정 전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고창 여행의 정점은 바로 오래된 사찰인 선운사(禪雲寺)에 있다. 녹음 속에서의 산책을 원한다면 선운사가 위치한 선운산 도립공원에 가는 것이 정말 좋다. 나는 오기가 생겨서 선운사 도솔암에 있다는 마애불을 보기 위해 장장 10 km 를 추가로 걷긴 했지만 ㅡ 그래서 옷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지만 ㅡ 오랜만에 이렇게 유유히 즐겁게 자연을 누리며 걷는다는 게 참 즐거웠다. 선운사가 또 유명한 것은 선운사 근처에 있는 수많은 풍천장어 음식점 때문일 것이다. 저녁에는 여기에 들러 장어구이 1인분을 먹었는데 정말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모든 반찬을 싹쓸이 해가면서 민물장어의 맛을 제대로 음미했다. (참고로 나는 장어가 느끼하다고 몇 점 못 먹는 사람들을 굉장히 애석하게 생각하는 장어 킬러이다. 그리고 추가로 고백할 것은, 점심에는 읍내에서 장어탕을 먹었다는 사실...)


이번 여행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사실 고창에서 더 유명한 것은 바로 고인돌이다. 고창의 시 엠블럼 및 마스코트에도 오롯이 담겨 있는 고인돌은, 고창군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의 귀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고창군이 '한반도의 첫 수도'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울에 사는 어린이들은 강화도가 아니면 온전한 형태의 고인돌을 많이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 곳에는 여러 기의 고인돌이 떼지어 있으니 대한민국 선사 시대의 유적을 경험하는 장소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창군은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겁게 관광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관광 컨텐츠가 다양한데 하나하나 품질이 우수하니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조금 욕심을 내어 남쪽으로 건너가면 전남 영광군의 법성포가 나오면서 굴비를 맛볼 수도 있을 것이고, 읍 근처의 석정온천에서 온천욕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장담하건데 전라북도 지역에서 관광으로는 고창군을 따를 지역이 없다고 생각한다. 고창 출신인 김대우 박사님의 표현대로 '전북을 모르는 사람이나 전주 한옥 마을같은 곳엘 가는 것이다.'


[정읍시]


정읍시는 두번째 방문이었다. 작년 벚꽃축제를 할 때 와 보고 와 볼 기회가 없었다. 정읍에 다시 가게 된 계기는 사실 성공회 감사성찬례였다. 지난 주에 성공회 감사성찬례를 드리기 위해 김제에 내려갔었는데 정작 교회 문은 잠겨있고 아무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 낭패를 겪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보다는 조금 더 먼 곳에 위치하지만 신부님과 전화 연락이 닿아 정보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 정읍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정읍시 두 번째 방문이 성사(!)되었다.


오늘은 마침 대전교구의 교구장주교이자 대한성공회 관구장주교인 유낙준(모세) 주교님의 집전이 예정된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정읍시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동 어딘가에 귀여운 성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 낯선 청년(?)의 등장에 당황해 하시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전도사님으로부터 자리를 안내 받으면서 성경과 성가책, 그리고 기도서까지 건네 받았다. 감사성찬례가 끝나고는 주교님, 그리고 정읍교회의 관할 사제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다음달에 익산시로 이사를 가게 되면 사실상 공주교회, 전주교회, 그리고 정읍교회 이 세 교회로부터 모두 4-50분가량 떨어진 지역에 살게 되는 것인데, 공주교회는 사실상 천안논산고속도로를 항시 이용해야 하니 쉽지 않을 것이고, 전주교회는 이전부터 연락이 잘 닿지 않다보니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러면 답은 정읍교회 뿐이라서... 일단은 서울교구에서 진행하는 평신도교육인 세실대학을 완전히 수료할 때까지는 본거지(?)에 해당하는 안양교회에 출석하면서 여러가지로 일을 도맡아 해야겠지만, 익산에 집을 얻게 된 이상 언제까지나 경기도와 전라북도를 주말마다 왔다갔다 하는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도 이제 다음 계획으로서 정읍교회를 출석 교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감사성찬례가 끝나고 나서 시내에 있는 유명한 한식당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아뿔싸, 1인은 상차림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2인으로 시키고 혼자 먹을까 하다가 그게 무슨 돈낭비인가 하고 식당을 등진 그 순간, 눈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짬뽕집이 하나 눈에 보였다. '양자강'이라는 이름의 중화식당이었는데 짬뽕이 유명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짬뽕을 먹는단다. 그래서 나도 줄서서 기다린 뒤 비빔짬뽕을 하나 먹어봤는데, 고기 베이스의 국물이 맵지도 않고 심각하게 짠 것도 아닌 것이 내 입맛에 딱이었다! 흔히 국내 짬뽕 5대천왕 뭐 이런 짬뽕집에 가면 너무 맵거나 후추 맛이 강해서 그날 먹고 나서 바로 배탈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여기는 참으로 달랐다. 깔끔하게 한 그릇을 비우고나니 속이 다 시원한 느낌!


밥을 먹고 나서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전설의 쌍화차거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찻집이라는 '모두랑쌍화차' 집에 들러 쌍화차를 하나 시켜 먹었다. 나이드신 분들이나 즐길 것같은 인테리어와는 달리 매우 젊은 여성분이 서빙을 해 줘서 깜짝 놀랐는데 생각해보니 나이드신 손님들이 찾는다면 그랬어야 할 선택이었겠거니 싶기도 했다. 아무튼 주문된 쌍화차의 크기와 가득 채워진 양에 압도당했는데, 특이한 것은 설탕을 따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쌍화차가 전혀 달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래서 너무 좋았다. 가끔 쌍화차를 먹으면 단 맛이 강해서 홀짝홀짝 잘 먹다가도 전혀 건강한 느낌이 들지 않더라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곳의 쌍화차는 가득 들어간 건더기(?)를 하나씩 훑어 먹으며 약재같은 맛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데 '내가 진정 쌍화차를 먹으러 왔구나!'하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해 주는 맛이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설탕은 일절 넣지 않았다.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땀도 나는 것 같고 기운도 나는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단 것을 먹고 난 뒤의 입안의 텁텁함이 전혀 없이 상쾌한 것이 참 좋았다.


정읍시는 고창군에 비하면 관광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으나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바로 가을의 내장산(內藏山)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게임 끝이긴 한데, 단풍놀이를 하러 내장산을 찾는 전국의 관광객이 어마어마하기 때문. 다음에 단풍이 절정에 이르기 전이나 그 후에, 사람들이 좀 덜 찾을 때 그 때 내장산에 가 봐야겠다. 그 외에라면 가족과 고창군 관광을 즐긴 뒤 정읍시에서 KTX를 타기 전에 이곳 쌍화차 거리에 함께 들르는 정도...랄까?


아무튼 이틀간의 정읍-고창 관광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또 뜻깊었다. 다음에 꼭 가족들과 함께, 또 친구들과 함께 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