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한국고분자학회 추계학술대회가 있었는데, 좌장을 맡은 고려대 김용주 교수님의 초청으로 금요일에 '기능성 고분자' 세션에서 25분 정도의 강연을 맡게 되었고 이 기회를 빌어 정말 오랜만에 오프라인 학회에 참석했다. 전북에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저 멀리 경주에서 학회를 한다는 것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으나 이참에 멀리 가 볼 기회도 생겼겠다, 경주에 가 본지 몇 년이 흘렀으니 어떻게 변했는지 구경도 해 볼 수 있겠다, 비교적 긍정적인 생각을 머리에 스스로 주입하고 그렇게 익산발 KTX를 타고 경주에 갔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차 해소될 기미가 보이는 10월 하순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다들 비대면 온라인 학회에 염증을 느껴서 이를 갈며 참석을 기다려왔는지, 학회장을 표현하자면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 있는 학회 중 하나인 고분자학회는 학술대회마다 늘 이래왔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매우 생경해진 이 광경을 오랜만에 목도하자니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방역 수칙 준수에 문제는 없는지 사뭇 의아해졌다. 학회 관계자에게서 슬쩍 넘겨 들은 말에 따르면, 예상보다 등록자 및 참석자 수가 많아서 학회나 화백컨벤션센터(HICO) 측에서도 긴장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백신 회의론자'와 같은 유사과학 추종자의 수가 극히 적으므로 대부분이 백신 접종을 완료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바, 집단 감염의 우려는 다른 규모의 모임에 비해 다소 적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모인 사람 수 자체가 워낙 많아서 후에 다른 연락이 오지는 않을는지 무척 궁금해하고 있는 중이다.


포스터 발표 장소에서는 모두가 마스크만 썼을 뿐,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단지 포스터 발표를 보면서 뭔가를 먹거나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이 굉장히 서글펐다.) 구두 발표는 실내에서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한 사람씩 개별 좌석이 주어지는 것과 온라인 줌 회의장소를 통해 발표 내용을 들을 수 있다는 점만 빼면 과거와 모든 것이 동일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강연에 초청해 주신 교수님, 단국대 교수로 임용된 대학 동문, 미네소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서 같은 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셨다가 최근에 숭실대에서 교편을 잡으신 박사님, 내 대학원 연구실 후배들,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분은 아닌 여러 대학의 교수님들까지. 예전에 출석하던 교회 멤버이자 포항공대에서 오랫동안 학위과정을 진행했던 후배까지 ㅡ 게다가 그는 다음주 월요일... 그러니까 내일 캐나다로 떠난다고 했다! 토론토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게 되었다고. 다들 오랜만에 만났지만, 마치 지난 주에 봤던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는 것이 참 신기했는데, 그런 어색함의 기운이 만남이 헤어짐으로 끝난 뒤에야 스멀스멀 올라왔다는 게 기묘했다 ㅡ 이처럼 가만 보면 아카데믹한 만남은 비즈니스적 만남보다 기이한 구석이 있다.


사실 학회 때에는 다른 학교의 교수님, 다른 기관의 박사님들과 열심히 부딪히고 자리를 가지면서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분이 되는 노력을 숱하게 펼쳐야 하는데, 사람이 숫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려는 속성을 가져서 그랬는지 좀 쭈뼛쭈뼛한 감이 없지 않았다. 사람 성격이 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 광고를 확실하게 잘 하고 다녀야 할텐데 그런 점에서는 내가 좀 낙제에 가깝단 말이지. 그래도 코로나19 시기 이후로 대면 활동이 좀더 활성화되면 천천히 내가 쌓은 결과들로 한분씩 한분씩 신뢰감 있게 찾아뵈면서 연락을 드리고 싶다 ㅡ 아무 것도 없이 인맥이나 술자리의 기억만을 가지고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는 사회 초년생의 패기가 아직 내겐 남아 있는 듯 하다.


내 지도교수님이 늘 말씀하셨다: 쪽팔리지 않게 살아야 한다. 부디 그렇게 사는 사람들로 주변 연구자들에게 기억되는 내가 되기를 이번 고분자학회에 참석하면서 진심으로 기원하게 되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