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신기한 발견]
Date 2008.10.09


응용 물리학 저널인 Applied Physics Letter (APL) 에 출판된 논문 중 하나를 읽고 A4 1장에 정리해서 매주 금요일까지 제출하는 것이 이번 학기 듣고 있는 응용 물리 과목의 숙제이다. 오늘 정말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이유인즉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내용이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논문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요즘 메모리(RAM이라든지, Flash Memory라든지...)에 관련된 수업을 듣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고분자에 메모리 기능을 넣으면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메모리라는 게 사실 쉽게 말하자면 이력 곡선(hysteresis curve)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고 그러려면 마치 spin의 up, down처럼 두 가지 다른 상태가 존재하면 되는데 고분자 backbone에 붙은 group들의 배향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예를들면 단량체들이 isotactic으로 배열된 고분자를 가정하자. 얘네한테 전기장을 걸어주면 단량체들이 backbone을 축으로 해서 휙 돌아 다른 배향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차츰 syndiotactic 상태를 지나 거울상의 isotactic 고분자 conformation을 갖게 될 것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은 해 봤지만 뭐 이런 게 있으려니 하면서 그냥 덮어두었던 게 어제의 일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현상을 이용한 번듯한 메모리 소자가 연구되고 있었다. 이른바 강유전성 고분자 램(Ferroelectric Polymer RAM). 금속 판 사이에서 강유전성의 고분자의 편극이 전기장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이용하여 메모리 소자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오늘 찾은 APL 논문에 따르면 vinylidene fluoride와 trifluoroethylene이 이 연구의 중심에 서 있는 물질이었는데 적당한 비율로 만든 공중합체가 강유전성을 보임으로 메모리 소자로서의 성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너무나도 흥분한 나머지 그 논문을 저장한 뒤 바로 읽기 시작해서 저녁 밥을 먹기 전에 다 해치워 버리고 말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 생각대로 하면 다 되는 세상인 건가. 난 정말 어렴풋이 그 생각을 했을 때 어른 과학자들이 내 생각을 읽었다면 '저것 참 재미있게 생각하는데? 하지만 얘야,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단다. 좀 더 공부나 열심히 하렴.' 이라고 비탄하게 여기곤 했는데. 내 참, 누군가가 해 놓은 '매뉴얼'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치고, 그래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다른 직장들과는 달리 연구하는 사람들의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웬만한 상상력 가지고는 남들이 하지 못했던 분야를 개척하기도 힘들고, 잔머리를 아무리 굴려본 들 남들이 이미 다 연구해서 '상용화'가 끝난 주제들을 주워담아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그나마 '이런 건 존재하지도 않겠지' 싶은 걸 생각했는데 버젓이 연구되는 하나의 주제였다니. (사실 그만큼 내가 깊은 통찰력과 안목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나저나, 이래서 논문을 읽으라는 건가? 이런저런 재미있는 상상을 하더라도 '당장 학부과목 따라가기도 벅차고 학점 따기도 버거운데 내까짓 것 이런 과학적 상상을 해봐야 어디 쓸모가 있겠어, 그냥 허상이고 어차피 대학원가면 다 부질없는 상상이었다는 걸 느끼겠지' 하면서 폐기처분하는 학부생이 나 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벌써 나는 마음에 큰 감동을 먹었고, 정말 마음먹은 대로, 상상하는 대로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내 생애 최초로 '논문'이라는 것을 찾아 본 것이 1학년 여름, 그러니까 3년 전인데, 첫해에는 논문에서 필요한 몇 줄만 발췌하는 수준이었고, 둘째 해에는 초록(Abstract)만 간신히 더듬는 수준이었고, 셋째 해에는 논문을 전체적으로 불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논문을 분석하고 그와 관련된 것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 어쩌면 예비 과학도로서 자신의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평점이나 학점, 듣는 과목이 아니라 논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논문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과학지식, 배경지식을 배운다는 것 뿐 아니라, 남이 수행한 실험과 그 의의를 파악하고 내 것으로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보통의 독서, 시험공부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분 좋다 :)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