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코로나바이러스의 늪에서 헤어나와 제대로 된 일상을 온전히 즐기기 시작한 덕인지, 2023년은 여러모로 뜻깊었다. 


1. 한 해를 시작할 때 결심했던 3,000자의 한자쓰기를 예상 외로 일찍 달성했다. 작년 12월 말,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한자 공책을 여러 권 구매했을 때 이걸 꾸준히 할 수 있는 건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게 한자를 휘갈겨 썼다. 펜도 두 개는 다 소모했고. 덕분에 올 한해 한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ㅡ 물론 새로 익힌 한자의 7-80%는 다 잊었겠지만 내년에도 또 보면 그 중에 2-30%는 다시 건져내겠지.. 이게 내가 (무식하게) 공부하는 방법!? 내년에는 천천히 복습하면서 시라카와 시즈카의 책을 보며 전서체도 조금씩 흉내내 써 봐야겠다.


2. 작년에 Bernd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독일에 짧게, 그것도 코로나 검사에 전전긍긍하며 다녀왔지만, 올해는 두 번의 출장을 포함해 세 번 해외에 나갔다 왔다. 특히 독일과 핀란드 출장은 꽤나 인상깊었는데, 연구원 사람들과 함께 해외에 나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좀 깨달았고 ㅡ 이렇게나 술을 마셔야한다는 것도 덤으로 깨달았고 ㅡ 온라인에서나 교류하던 사람들과 직접 대면해서 연구 얘기도 하고 밥도 먹으니 유쾌한 경험이었다. 당장 내년에도 독일 갈 일정이 두어 번 계획되어 있고 일본을 비롯한 다른 지역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아무쪼록 유익하고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3. 2023년의 가장 특별한 기억이라면 역시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작년 한국탄소학회 기간 중에 출판사로부터 받은 연락이 출발점이 된 책쓰기는 올해 1-3월에 중점적으로 진행되었고, 이후 편집과 교정 등의 과정을 충분히 거친 끝에 '읽자마자 과학의 역사가 보이는 원소 어원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책은 중등 교육을 이수 중인 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읽힐 수준으로 쓰였는데, 몇몇 단체에서 추천 도서로 선정되고 있기도 하고 온라인 서점 중 가장 규모가 큰 '알라딘'에서도 화학 분야에서는 그래도 지속적으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하루에 여러 권 이상은 꾸준히 팔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쪼록 실험실 생각만 나는 화학 이면에 이런 얘기도 있다는 것을 어린 학생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중쇄도 거듭되길 살짝 바라면서... 허허. 그리고 책 쓰는 것 때문에 유튜브 작업이 굉장히 지체되었는데 내년에는 영상 제작에 좀 더 성의를 보여야겠다.


4. 실제 골프장에 가서 라운딩을 한 경험도 잊지 못할 올해의 순간 중 하나이다. 일정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골프장을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기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기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부터 주어졌다. 급히 옷도 챙기고 물품도 사고 나름의 준비(?)를 하고 나갔지만 역시나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었고,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더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감동적인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초보를 데리고 경험을 시켜준 진환이와 경족이에게 고마울 따름이고, 내년에는 계절마다, 특히 아버지와 꼭 같이 라운딩을 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5. 웨이트 트레이닝의 효과를 체감한 드문 해이기도 했다. 내가 헬스장이라는 곳을 처음 간 게 무려 2008년이고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운동을 해왔는데, 올해 연구원에서 운동에 진심인 박사님으로부터 학습한 자세(?)를 바탕으로 운동을 비교적 전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무겁게 했다. 그랬더니 정말 전보다 더 안정적으로, 더 운동 효과를 누리며 운동할 수 있었다. 체중도 73 kg 정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중인데 확실히 전보다는 근육량이 는 게 맞아보인다 ㅡ 지난 여름부터 보는 사람들마다 커졌다고들 얘기를 듣는다. 내년 목표로 골격근량 33 kg 초과에 3대 350을 하라고 종용받는(?) 중인데, 아무튼 마흔이 가까워지는 이 나이에도 성장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축복 아닌가. 부상은 조심하면서도 꾸준히 해 나가야겠다.


6. 연구와 관련해서는 이제야 어느 정도 나만의 영역이 구축되어간다는 느낌이 구체화되는 한 해였다. 언젠가 센터장 박사님이 '40대 이하 한국 박사들 중에 탄소섬유 연구하는 사람이 김 박사밖에 없어.'라고 얘기하셨을 때 이게 이렇게 될 수 있나 싶은 충격을 받았다. 확실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리그닌과 셀룰로스로 탄소섬유를 제조하려고 시도하는 30대 박사는 나밖에 없는 게 확실하다. 뭐 대단한 성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고, 혼자 한다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의 전문성을 갖추고 과학을 한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연구원 입사 초반에는 탄소 소재를 잘 몰라 어버버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론적, 실험 측면의 기틀은 다져진 듯하다. 이제 잘 가르친 학생연구원도 사회에 보내야 할 시점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지금까지의 연구를 기반으로 일정한 결론을 내어 사회에 기여해야할텐데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늘 그래왔듯이 즐겁게 연구를 지속해야겠다.


무엇보다도 한 해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 행복한 기억은 없었다. 부디 2024년도 늘 새로운이 가득한, 마음을 두근대게 하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