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재즈와 함께하는 호젓한 밤길]
Date 2009.05.15


최근 퇴근 시간이 늦어지면서 경인교대에서 마을버스 6-2를 타고 집에 갈 수 없게 되었다. 5520이 자정이 넘어서도 운행하지만 마을버스는 아니다. 결국 집까지 가는 길의 허리 쯤에서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하릴없이 종종 ㅡ 최근까지만 해도 ㅡ 근처를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집까지 갔지만, 그러면 그 짧은 거리임에도 5000원 정도의 택시비가 지갑에서 증발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기에 늘 찜찜하던 차였다. 그래서 요즘은 경인교대에서 내리면 관악역까지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경인교대에서 관악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인데다가 가로등만 켜져 있고, 모든 음식점들은 문을 닫고 불마저 다 꺼져 있다. 더욱 슬픈 건 10분 정도 걷는 동안에는 개 짖는 소리와 도로를 질주하는 차의 굉음만 들릴 뿐 인가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몇몇 있다면 동병상련을 느끼며 당차게 이 호젓한 거리를 걸어갈텐데, 걷다 보면 나 혼자 걷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 이 길이 생각보다 유쾌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관악역까지 걸어가는 이 방법을 애용하고 있다. 다름아닌 CD 플레이어 덕분에.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는 CD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사실 집 밖에서 워크맨이나 MP3를 가지고 음악을 들으며 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새로 사신 iPod에 ABBA 노래를 잔뜩 집어 넣고 내 앞에서 자랑을 하실 때에도 나는 '그런 전자 기기는 내겐 무용지물'이라며 혀를 끌끌 찼던 사람이 바로 나다. (좀 더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이런 면에서 아버지는 참으로 앞서 나간 사람이다. 하루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귀에 꽂는 이어폰이 아닌 귀에 거는 요상한 장치를 하고 한 손에는 iPod을 들고 아버지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재즈를 말로만 좋아한다고 하지 말아야지'하는 신념과 함께 과감히 재즈 음악 CD를 사기 시작했다. 그게 한 2년 전쯤인데, 나도 감상하는 사람으로서 이동하면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장치를 사야겠다 싶어서 CDP를 샀다. 주변 사람들은 왠 구닥다리 물건을 사냐고 말렸지만, 나는 왠지 '막귀'는 알 수 없다는 CD 음질과 mp3 음질의 차이를 나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CDP를 샀던 것이다. (참고로 두 음질의 차이가 어떤 지 나는 모르겠다. 요즘은 단지 'CD 음질이 더 나을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이 깨지지 않기 위해 mp3는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 오늘은 최근에 구매했던 Herbie Hancock의 'Maiden Voyage'를 들으며 오는 길이었다. 생각보다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밤길에 음악을 들으며 가면 좋은 이유는, 우선 주변 소음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나중에 글에도 적을 것이지만, 나는 CDP를 사고 음악을 길에서 듣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큰 소음 공해에 '길들여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밤길에도 빠른 속도로 차가 다니니까 소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런 것은 이따금씩 지나가는 일. 낮처럼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를 둔감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밤에는 베이스의 튕김과 라이드 심벌의 팅팅거리는 소리, 심지어는 색소폰의 미분음이라도 더 잘 들리는 것 같다.

또 밤길에는 사실 남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흥얼거린다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아니면 걸으면서 리듬을 밟아가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뭐니뭐니해도 좋은 건, 나같은 초보 길거리 감상자의 경우, '내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에 호기심 어린, 혹은 불쾌한 눈길을 보내며 주목할 '가상 청중'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굳이 이런 기분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만, 나는 왠지 이어폰을 꽂고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것에 한때 상당한 문제 의식 내지는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상대적으로 남들이 없으면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사실 아무도 걷지 않는 그런 길에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는 게 '별 대수롭지 않은 재미'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후미진 밤길을 걷는 마당에 그런 재미면 어떻고, 그런 수준이 만족이면 어떤가. 어차피 기대치가 낮은 상황에서는 작은 만족이라도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법이니까. 앞으로 이 밤길을 자주 애용해야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