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어느 미용사]
Date 2010.05.23


일전에 하루 이야기에 내 머리를 깎아주는 분은 남자 미용사 형이라고 했었다. 언제 거기서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겨갈 지는 잘 모르겠으나 꽤 오랫동안 내 '깐깐하게 꼬인' 머리를 맡아주셨고 오늘도 머리를 전보다는 시원하게 깎았다. 처음에는 내가 (낯을 가리느라) 펌을 할 때 그 긴 시간동안 별말 않고 잠자코 있었더니 그 분 말씀하시길 '정말 조용하신 것 같아요' 그 분은 항상 기회를 보시다가 몇 번씩 뭔가를 물어 보거나 한 것 같은데 산발적일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대화의 물꼬가 와장창 터지게 된 건 어쩌다가 개인 신상 이야기가 나와서였다. 으레 서울대생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이 어느 학교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을 밝히기를 꺼려한다. 혹 밝히더라도 무슨 죄를 지은 것 마냥 수줍게 혹은 머뭇거리면서 '음.. 서울대예요'라고 하는 게 서울대생 85%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는 제발 학교만은 묻지 말라고 애원했는데, 결국 정체(?)를 드러냈다. 그랬더니 그 미용사는 매우 태연하게 ㅡ 그러나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음이 분명하다. 정확히 85%가 그렇다. ㅡ 약장을 표현하는 서울대 정문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국립서울대학교의 ㄱ, ㅅ, ㄷ을 따서 그렇게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부터는 뭔가 이런저런 하는 말이 많아졌다. 물론 매직 펌을 하는 동안에는 서로 실수하면 안 되니까 약간 긴장을 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지는 않는데, 단순한 커트인 경우에는 워낙 숙련된 솜씨를 가졌는데다가 미용사도 곧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기에 머리를 깎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된다. 오늘같은 경우에는 머리를 깎는 십수분의 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뭐랄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쉭쉭 지나갔다.

재미있는게, 나도 좀 변했다. 예전같으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혹은 공적인 일에 의해서 만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단순히 '받아 주기만'하고 내가 뭔가 이끌어가고자 하지는 않았다. 맞받아 치거나 농담을 섞지도 못했다. 이를테면 오늘 그 미용사가 내게 '혹시 애완동물 기르세요?'라고 물어봤을 때 '아, 저희 집은 애완동물 길러본 적이 없어요.', '저희 아버지는 개를 좋아하시는데.. 좀 큰 개 있잖아요.'와 같이 내 대답을 실컷 한 것에서 대화를 그쳤다면 그건 예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혹시 애완동물 기르세요?'라고 맞받아 질문할 줄 안다. 어쩌면 그게 내 입에서 그 분이 원했던 질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아니나다를까, 그 미용사는 최근에 작은 개 한마리를 분양받았다. 내가 '혹시 애완동물 기르세요?'라고 묻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 5분동안 신나게 서로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나는 심지어 '이 일을 하신지 몇 년이 되었나?'라고까지 물었다. 예전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내용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뜻밖에도 개인적인 일들을 풀어놓으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인가. 같이 일하는 알바생도 아는 내용인지 궁금할 정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글쎄, 그들만의 익숙한 교묘한 화술일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말이 그로 하여금 이야기를 계속 하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고 (너무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유가 어찌 되었든, 오늘 머리를 다 깎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그냥 기분이 묘했다. 머리 깎는 시간동안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고, 그리고 너무나도 신기했다. 내가 좀 변하긴 했구나 싶은 그런 생각? 사실 애완동물 이야기할 때 '물어볼까 말까' 진짜 5초간 수만번 진동했는데, 물어보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고. 다음에 머리 깎으러 갔을 때에는 뭔가 더 편하게 여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항상 미용사 형은 머리를 깎아주면서 결과물을 그때그때 보여주는데 나는 정작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결과물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첫 논문이 나오면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 중에 어느새 이 미용실 형도 들어가 있는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