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새마을금고에 갔다. 오전 9시부터 2층에서 대출업무를 진행한다기에 건물 2층에 있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9시 정각에도 문이 열리지 않길래 지점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아뿔싸, 2층으로 가려면 1층을 통해 올라가야 한단다. 부리나케 내려가 1층 입구를 지나 내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다행히 나보다 앞서 온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504라는 대기번호 숫자표를 들고 올라간 나는, 그럼에도 거의 1시간을 기다려서야 대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대출을 희망하는 각 사람마다 절차 진행을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탓이다.


대출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꺼냈고, 신분증과 도장을 꺼냈다. 상담 직원이 기본적인 사항들을 체크하면서 내 앞에 수십장은 되어 보이는 A4 용지 뭉치를 꺼내놓았는데, 이후 30여분간 나는 이름을 쓰고, 주소를 적고, 핸드폰 번호를 기입하고, 대출받을 금액을 한글로 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기를 반복했다. 세상에, 돈 빌리는 것이 이토록 간단치 않구나. 업무 전에 핸드폰으로 검색하면서 대출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미리 읽어보았지만, 실제 대출 관련 서류들에 적혀있는 다양한 정보들은 단기간에 익히기는 과히 쉽지 않은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차라리 한자로 적혀 있었다면 이해가 쉬웠으려나, 도통 말뜻이 확 와닿지 않는 단어들도 참 많았다.


익산은 규제 지역이 아니라서 전체 금액의 90%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물론 내가 대출받기로 계약한 90%에 해당하는 금액은 같은 평형의 서울 집 절반 가격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겠지만,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융통해본 금액 중 가장 비싼 금액이었다. '억'이라는 단어가 현실세계에 강림한 순간이었다 ㅡ 도대체 십수억이 왔다갔다하는 서울 지역 사람들은 서류에 금액을 한글로 적을 때 살 떨려서 이거 살 수나 있나 모르겠다. 60%에 해당하던 중도금 대출이야 그간 새마을금고에서 이자 납부를 다 진행해 주었으니 내 금융생활과는 무관한 영역에 속했는데, 이제 입주를 진행하고나서 잔금을 납부하고 나면 이 진짜 대출금에 매겨진 이자가 매달 내 통장에 안부 인사를 물으러 올 테다.


최근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1년 전 이맘 때 생각했던 수준의 이자에 거의 1.8배 수준의 이자를 감당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금리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매달 납부해야 할 이자가 동일한 금액이 아니겠지만, 문제는 금리 추가 상승이 예견된다는 점이다. 뭐 어쩌겠는가? 30대 중후반이 되어서까지 억 단위의 돈을 모으지 못한 내 탓이려니 해야지. 대출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대출 관련된 이야기를 죽 늘어놓으니, 그러니 결국 나이가 들어 밖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별뜻없이 외식 하기를 삼가는 건 순전히 대출금 이자 때문이라고 말씀하였다. 규모 있는 경제 생활의 시작이니만큼 앞으로는 더욱 조리 있는 금전 관리를 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하긴 내 경제 생활은 허랑방탕 그 자체였다. 현금이 절실히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은 2009~2010년 대학원 입학 초기 시절, 한없이 낮았던 인건비를 받으면서도 변액보험에 돈을 지속적으로 넣어야 했던 그 시기 뿐이었다. 그나마도 모아두고 있었던 변액보험 투자금을 깨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에 현금이 마르던 상황을 감내한 것이지, 실로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달리 소비가 특출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절약이나 근검이 특출난 것도 아니었다. 사고 싶은 것은 샀고, 먹고 싶은 것은 먹었고, 가고 싶은 곳은 갔다. 오죽하면 내가 믿고 있던 나만의 격언은 '예상치 못하게 수입이 생기면 불의의 지출이 생기기 마련이며, 반면 갑작스런 지출이 있거든 뜻하지 않았던 수입이 생기더라'였다.


이런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자세로 통장을 관리하던 내게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 셈이다. 글쎄, 무엇부터 줄여야 할까? 일단 한 달 몇 천원, 몇 만원의 지출이라도 크고 엄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할 듯하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