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보스턴 총정리]
Date 2010.08.29


1. 학회는 정말 재미있었다. 여태 내가 몇 번 학회를 안 다녀봐서 아직까지는 그 분위기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유명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에 심도 있는 강연을 하고, 날카로운 문답 시간을 통해 주제에 대한 이해를 쌓아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주제에 집중적으로 다같이 생각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학회에서는 그러한 모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곳 저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특히 ACS(미 화학회, American Chemical Society)는 세계 어느 화학회보다도 크고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고,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ㅡ 무려 160여개의 세션이 개최된다. 고분자 관련해서도 수십개의 세션이 개최된다. 한국 고분자학회에서 세션이 총 여남은 개 개최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다. 여기서 발표되는 연구 내용과 수많은 교류 및 토론이 그야말로 현대 화학의 ‘cutting-edge’인 셈이다.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새내기 대학원생으로서는 매우 값진 일인 것이고, 흥미로운 일이라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으며, 정말 많은 화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 그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매우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창의성으로 무장된 연구자의 발표를 듣다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가끔 좌절스럽기도 했는데, 아직 나는 어리니까 ‘언젠가는 저런 사람처럼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강연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내 공부와 연구, 실험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특히 thiol-ene chemistry에 대한 세션을 들으면서 ‘나도 합성 내지는 화학다운 화학을 해 봐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영어는 정말 필수적이다. 사실 과학적인 용어와 표현으로 무장된 과학 영어는 이제 어느 정도 적응되었고 사실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간 영문으로 쓰인 논문을 항상 읽고 영어로 된 자료 및 강연을 항상 접하다 보니 내가 하고 있는 연구 내용을 쓰고 말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문제는 다른 영어 화자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아시아계 발표자의 강연이 있는 경우에 발표는 무리 없이 잘 진행되었지만 질의응답 시간에서 크게 막혀 발표자는 물론 청중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발표내용은 완벽히 외우고 잘 구사했지만 정작 외국인들이 영어로 묻자 그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혹은 엉뚱한 답변을 해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사실 나 또한 비슷한 경우를 많이 겪었다. 내가 묻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내가 그들의 물음을 듣고 답하는 것에는 항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답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즉석에서 바로 답할 때에는 단어 선택도 이상했고 표현도 엉망진창이며 말하고 나서 생각하면 종종 ‘내가 왜 그런 멍청한 답변을 했지?’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았다. 특히 과학 표현이 아닌 일상 회화에서는 더 많이 느꼈는데, 이번에 좀 각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앞으로 회화 위주의 영어 공부가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마치 유아적인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가진 아이로 비치는 것 같아서 좀 속상했다. 뭐든 익숙해져야 쉽게 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그 쪽을 등한시한 게 맞는 것 같다. 정말 복잡하고 유려한 표현이 섞인 말이 아닌 단순하고 간결한 한 문장이 항상 아쉬웠던 순간들이었다.

3. 미국 내에서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엄청 많아 놀라웠다. 이미 대부분의 공항에서 표지판에는 영어 밑에 스페인어가 병기되어 있었고, 사실상 잡무를 보는 계층의 사람들은 전부 일상대화를 스페인어로 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한다고 해서 찬반 여론이 격돌했었는데, 나는 영어의 중심지 중 하나인 이 곳 미국에서 스페인어 몰입 교육을 하는 유아원을 보고 적잖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TV에서도 이중 언어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미국 국내선 항공기에서 틀어주는 안전 비디오는 영어로 먼저 방송된 뒤 (엄청나게 빠른) 스페인어로 방송된다. 역시, 스페인어는 배워둘 만한 언어임에 틀림없었다. 히스패닉 인구의 성장과 영향력의 팽창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 프루덴셜 타워에 올라가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서버의 이름이 Juan인 것을 보고 라틴 아메리카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콜롬비아 사람이었다. 한창 스페인어를 막 섞어가면서 거기 있던 두 명의 웨이터와 수다를 떨었는데 (한 명은 멕시코 사람) 스페인어가 조금 들어가니까 완전 분위기가 화기애애 그 자체였다. 다음에 보스턴에 오게 되면 꼭 친구들과 함께 여기 다시 오겠노라고 서약(?)을 하고 나왔다.

4. 여행의 측면에서는, 절약정신이 점점 실종되는 것 같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참 불행한 일이지만 점점 그렇게 변해 간다. 돈이 좀 들어도 편하고 맛있으며 좀 더 좋은 구경거리를 선사해 준다면 그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주저없이 택하는 경향이 점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먹고 싶을 때 사 먹고, 비싼 것도 먹어 보고, 야구장 티켓도 기왕이면 필드에 더 가까운 곳으로 잡고 (grandstand석은 보통석에 비해 2배 정도 비쌌다.), 현금이 없으면 카드를 긁고, 필요한 용품이 있으면 근처 마트에 가서 그냥 쉽게 사오고, 이런 식이다. Hillsong conference 참석을 위해 시드니에 갔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돈을 펑펑 쓰다오는’ 격이었다. 그 때는 ₤1 도 아까워서 교회 사람들과 함께 매일 맥도날드 치즈버거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그러다가 스페인 여행 때에는 한 끼 €30이 넘는 밥도 주저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난 정말 그 때 욕심을 가지고 먹는 데 돈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굶주리며 지내다가는 스페인에 대한 적의만 생길 것 같았단 말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카드 대금도 확실히 다 지불했고 월급 및 장학금 등 돈이 쌓이던 시기였던지라 비상시에 사용해야 할 통장의 잔고는 충분했다. 내가 굳이 여기서 쫄쫄 굶는 한국인으로 지낼 필요가 무어냔 말이냐. 지난 싱가포르 여행 때 이렇게 편히 지내다가 현금은 다 떨어지고 통장 잔고에는 마침 돈이 별로 없어 신용카드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이번 보스턴 여정은 그런 걱정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학회와 약간의 관광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경제적으로 참 풍요롭게 지냈던 시간들이었다.

5. 그러나 유스호스텔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사실 씻고 자는 데 유스호스텔보다 좋아 봐야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나이를 더 먹게 되고, 이제는 씻고 자는 데에서도 더 안락함을 느끼기 원하는 때가 되면 ㅡ 그리고 가족이 함께 간다면 ㅡ 그제서야 호텔을 잡겠지만, 가격 대비 성능 면에서 유스호스텔을 따라올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유스호스텔을 전적으로 애용할 참이다. 특히 Hostelling International과 같은 브랜드 유스호스텔이 점점 많아지면서 꽤나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소가 많아졌다. 이런 곳을 마다하고 별 세 개짜리 호텔이나 Inn을 잡는 건 썩 좋지 못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차라리 여기서 줄인 숙박비를 먹거나 구경하는 데 쓰는 게 더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유스호스텔은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함께 묵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재미가 가장 크다. 한국인을 만나면 친구가 될 수 있고. 이번에는 스웨덴 사람으로부터 0부터 10까지 스웨덴어도 익혔다. 물론 쉽지 않았다. 홍콩에서 온 어떤 박사과정생도 이번에 나처럼 학회차 보스턴에 왔던 것이었다. 우리는 은 나노큐브에 대해 얘기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6. 보스턴은 볼거리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싱가포르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으로 freedom trail이라는 미국의 역사와 관계가 있는 유서 깊은 여행 루트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매우 흥미로운 길이냐 하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프루덴셜 타워에서 재즈 공연과 함께한 (비싼) 저녁식사가 더 기억에 남았고, Fenway park에서 봤던 야구경기가 더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여기는 미국이고 또 유명한 도시이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음에 찾게 되면 사전 지식을 좀 더 쌓은 뒤에 여유있게 보스턴을 더 즐겨봐야겠다. Cape Cod나 보스턴 차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그 장소에 간다든지.

7. 야구경기에 대해서는 몇 마디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의 Boston Redsox에 대한 애정에 장난이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팀과 관련된 모자, 셔츠, 점퍼 등을 꼭 챙겨 입고 있었고, 응원을 할 때에도 나이와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기 시작전에 국가가 울려 퍼지고, 7회부터는 매 이닝 끝날 때마다 특별한 순서들이 있어 ‘God bless America’를 제창한다든지, 처음 들어보는 보스턴 레드삭스 송을 흥겹게 부른다든지 아무튼 열성이었다. 이번에 관람한 경기는 Seattle Mariners와의 대결이었는데 전날 우천 취소되는 바람에 그날 더블헤더였고, 나는 점심에 있었던 game 1을 관람한 것이었다. 유명한 이치로 스즈키가 시애틀의 1번 타자였다. 이날 경기는 6회까지 0:0으로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집중력 있게 터진 양팀의 점수내기로 분위기는 급반전되었고 결국 5:3으로 홈팀인 보스턴 레드삭스가 승리했다. 자리를 꽤 가까운 데 잡아서 (=$63) 잠실에서 봤을 때보다 더 가까이 선수들을 보며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나름 야구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인 것 같긴 하지만 너무 길어서 원…

8. 스마트폰은 매우 쓸만하며 무료 Wi-Fi가 되는 지역에서는 강력한 도구였다. 가끔 구글 토크로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메시지를 주고 받았고, 메일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뉴스도 읽어볼 수 있었다. 다행히 보스턴 컨벤션 센터에서는 무료 Wi-Fi가 항상 가능했기 때문에 학회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Wi-Fi를 켜는 것이었다. 전압 변환기를 산 이후부터는 핸드폰 충전을 매일 하면서 무선 인터넷 사용에 문제가 없게끔 최선을 다 했는데, 만일 3G망을 이용해서 했더라면 데이터 요금이 수십만원 나왔을 것이다. Wi-Fi 만세!! 한국에서는 몇 명 못 봤는데 미국에서는 나와 같은 기종인 넥서스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9. 시차 적응은 정말 쉽지 않았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이틀간은 잠을 거의 못 잤다. 사실 내 사전에 시차 문제는 없어! 자신만만하게 하고 갔다가 큰 코 다친 격이었다. 정말 6시간동안 잠도 못 잔 채 홀로 눈감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역 그 자체였다. 그 다음날에는 잠에 대한 온갖 철학적 사유를 거친 뒤에야 두 시간 정도 선잠을 잘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상당히 곤히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이틀간 정말 힘들었다. (사실 한국에서 시차 적응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매우 걱정하고 있는 중이다.)

10. 이제 남은 것은 남아메리카뿐이다. 30세가 되기 전에 육대주를 다 밟아볼 수 있을 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길 고대하고 있다. 앞으로 남은 박사과정 동안 더 좋은 결과들을 발표한다면 그만큼 더 많이 돌아다닐(?) 기회가 주어지게 되지 않을까? 물론 나돌아다니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학원생이 다른 직장인이나 학부생들이 가지지 못하는 특혜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이번 보스턴 기행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에 돌아가면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할 작정이다. :)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