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겐 독일어 교재가 세 권 있다.


가장 먼저 산 책은 가장 오래된 독일어 문법서라고도 알려진 '최신 독일어 (안사균 著)'인데, 대학원 시절 참고를 위해 샀던 책이지만 독일에서 온 친구들은 그 책의 예문에 등장하는 Knabe라는 단어를 보더니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 책은 너무 옛날식이라서 최신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산 책은 십여년 전 당시 서울대에서 독일어 교재로 사용하던 '대학생을 위한 활용 독일어 I' 인데, 이 책은 몇 번 보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세 번째로 책을 한 권 샀는데, 압축 요약/정리된 내용을 읽고 싶었기 때문에 서점에서 몇 번 보고 바로 '초보자를 위한 독일어 첫걸음'이란 책을 샀더랬다. 하지만 이 책 초반부에 등장하는 형용사와 명사의 변화형 ㅡ 강변화? 약변화? 혼합변화? ㅡ 만 죽어라고 읽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독일어 교본은 좀체 끝까지 읽는 데 성공한 책이 없었다. 여기에는 독일 친구들이 워낙 영어를 잘해서 굳이 독일어를 배워야한다는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다는 일종의 남탓도 섞여 있기 하지만... 아무튼 독일어는 뭔가 꾸준히 잡고 홀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고, 그냥 독일어는 '읽는 법만 잘 알고 있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독일어 공부는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후로 독일어를 모국어로 삼는 연구자를 수도 없이 만났으면서도!)


그러다가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2014년쯤이었나, 카자흐스탄에 가기 전 공부하기 시작했던 러시아어였다. 흔히 독일어 공부라고 하면 der, des, dem, den 등 변화형 이야기만 주구장창하는데, 사실 러시아어에 비하면 독일어의 변화형은 약과다. 독일어에는 주격, 생격, 여격, 대격만 있지만 러시아어의 변화형에는 두 개 추가되어 주격, 생격, 여격, 대격, 조격, 전치격이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키릴 문자와 각종 동사들의 복잡미묘한 굴절 형태, 그리고 아무리 거듭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불완료상/완료상 짝의 등장은 사람을 정말 곤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뿌쉬낀 하우스의 '러시아로 가는길 3단계'를 어찌저찌 혼자 떼고 나서 어느 날 독일어 책을 무심결에 집어 들었다가 든 생각은... '이거 이 정도면 해볼 만 하겠는데?'


사실 내가 독일어에 뒤늦게 필요성을 느끼게 된 이유는, 작년 내내 생각보다 앞으로 여전히 독일어 화자들과 만날 기회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절감하면서였다. 당장 KIST 전북과 함께 협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일 작센(Sachsen) 주(州) 지역 사람들이고, 심지어 셀룰로스 관련 협업하는 핀란드 알토 대학(Aalto Yliopisto)의 교수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이는 즉 내가 소통할 유럽 연구자들 모두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나와 친분이 있는 마인츠(Mainz) 대학 및 막스 플랑크 고분자 연구소(MPIP) 출신 친구들 역시 대부분 독일인이다. 이제까지는 영어로 잘 하면 되는 정도였다고 하지만, 만일 내가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길 원한다면 이제는 뭔가 플러스 알파가 필요한 시점. 게다가 당장 올해에 독일을 최소 두 번 왔다갔다할텐데, 이제 독일 사람들과 이 정도 교류하는 수준이라면 독일어로 간단한 말 정도는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런 사명감마저 생겼다. 그런 상황에 독일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와 교재는 주변에 차고 넘쳤으니, 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난 달부터 급히 KIST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강좌 수강료 지원을 통해 시원스쿨에서 제공하는 '진짜학습지'를 구매했다. 1강부터 30강까지를 지난 달에 몽땅 들었고, 그리고 31강부터 60강까지를 이번 달에 듣고 있다. 이 강좌가 다루는 언어 교육 수준은 유럽언어공통기준 A1 수준으로 그리 높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이 정도 수준의 외국어라도 인터넷 강좌의 도움으로 꾸준하게 익힌다는 게 굉장한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만 보면서 혼자 익히다 보면, 책을 읽을 때는 알게 된 것 같더라도 확실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강제성(?)이 없다 보니 금세 잊곤 했는데, 아무리 인터넷 강좌라도 강좌는 강좌다 보니 학생의 기분으로 조금 더 집중해서 공부하는 그런 측면이 있었다. 

예상하건대 러시아어 독학하면서도 느끼긴 했지만, 독일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 A2 수준의 이해는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살아있는 독일어를 더 잘하려면, 아무래도 Bernd와 Hannah에게 자꾸 말을 걸어서 좀 귀찮게 해야겠다 ㅡ 독일 친구들이 있는데, 독일어 배우는 데 끙끙댄다면 그것도 좀 우스운 일 아니던가. 아무튼 첫 발은 이렇게 잘 떼었으니 할 때까지 해 봐야겠다. 그리고 이 진짜학습지 과목이 익히는 내용이 '대학생을 위한 활용 독일어 I'에서 다루는 범위와 비슷한데, 진짜학습지 강좌가 모두 끝나면 그 교재를 한번 쭉 읽어나가면서 복습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외국어 공부 욕심이 많은 게 탈이지만, 이런 욕심은 언제든지 (내적으로) 환영이다. 독일어 강의를 듣길 잘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