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안양교회 전교인 수련회를 위해 춘천에 있는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의 성 요한 피정의 집에 방문했다. 모든 순서가 순조롭게 끝나고 이튿날 집에 가기 전 잠시 휴식 시간이 생겨서 본 예배당에 들렀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이 피아노에 모두 다닥다닥 달라붙어 이것저것 치고 있지 않은가. 그 나이쯤 되는 아이들이 보통 치는 곡들이라고는 소곡집의 곡들 혹은 좀 치는 애들이라면 소나티네(Sonatine) 몇 곡이었는데,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웬 아저씨가 등장하자 이거 쳐 보세요, 저거 쳐 보세요 하는 주문이 끊이지 않게 들려왔다. 외우고 있는 악보는 별로 없었으나 다만 아이들이 복음성가 중에 '마지막 날에'라는 찬양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하여 코드로 잡고 반주를 해 주었더니 굉장히 좋아하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일단, 아이들에게는 악보 없이 코드만 잡으면서 멜로디를 유추하며 자유롭게 연주한다는 것이 꽤 신기했던 모양이다.


'마지막 날에'가 마치고나서 뭔가 그래도 애들한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꽝'하고 건반을 눌렀으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pathetique)'의 1악장 도입부였다. 일순간 아이들 사이에서 정적이 흐르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1악장 앞 부분은 굉장히 장엄한데 중간 연결부분에 빠르게 스케일을 32분음표와 잇단음표들로 잇는 부분이 있다. 아이들은 여기서 손가락이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냐며 신기해 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악보를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도입부를 다 마치고 중심 주제로 들어가고 몇 마디 안 되어서 연주를 종료해야 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던지 아이들이 눈빛이 모두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건반을 그렇게 빠르게 칠 수 있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아농(Hanon)'의 연습곡을 열심히 연습하며 손가락 힘과 음계 치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한다고 정말 얄미운 모범생인양 그렇게 충고를 던져 주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베토벤 소나타 악보를 몇 개 다운로드 받아 인쇄하고 쳐 봤다. 살면서 여러 피아노 곡을 쳤지만, 가장 많이 쳐 본 횟수로는 이 베토벤의 '비창'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베토벤 소나타 곡집을 사서 가장 처음으로 연주했던 것이 바로 이 '비창' 3악장이었다. 그러다가 1악장과 2악장이 그리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당시 피아노 학원을 취미로 다니고 있던 교회 동기 여학생 한 명이 연주회를 위해 연습했던 곡이 바로 이 곡이었으며, 잠시 쉬는 틈에 그가 그 곡을 연주해 보였는데 그 순간 바로 이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거의 1년 반동안 피아노에는 손도 대지 않고 살고 있었는데, 그날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나면 베토벤의 '비창'을 연습하면서 동시에 다른 곡들도 혼자서 연습하곤 했다. 물론 이 때의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인해 건반을 매우 세게 때리는 안 좋은 습관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맹렬히 연습한 결과 나는 비창 전악장을 적절하게 완주는 할 수 있었고 ― 전공자가 아니기에 듣기에 아름다울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 가끔 기회가 될 때 연주하곤 했다. 특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교내 악기 연주 대회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이 곡을 가지고 나갔다. 이 곡의 맹렬함과 장엄함은 언제나 나를 환호하게 만들었고, 곡을 완전히 마칠 때에는 나도 모르는 그런 희열에 젖곤 했다.


최근에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이 곡을 연습하고 있는데, 아예 통째로 외워버릴 생각으로 천천히 치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되어 피아노를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칠 수 있도록 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