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집청소를 마치고 강풍 속에서 빨래를 기어이 일광 건조시킨 뒤 월세로 살 아파트를 알아보러 익산에 갔다. 슬프게도 팔봉동에는 매물이 없었고, 대신 부송동 쪽으로 가니까 내가 원하는 면적의 집의 시세가 대략 어느 정도 한다는 사실까지는 알게 되었다.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20년은 된 아파트들이 많았는데, 예전 안양의 1차 성원아파트 단지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내부만 말끔하게 잘 리모델링되어있다면 딱히 마다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주 시기가 확정되야 집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부동산 관계자들의 말에 다음달에 다시 한 번 와야겠다 하는 결심 정도로 오늘의 탐방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나서 돌아오는 길에 바로 봉동읍으로 돌아오지 않고, 익산시 왕궁면을 거쳐가면서 거기에 있는 왕궁리 유적에 갔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내리자마자 안경도 무시한채 흙바람이 내 안구를 거칠게 노크하고 있는 걸 간신히 뿌리치고 눈을 들어보니 저쪽에 석탑이 하나 우두커니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석탑, 잘 조성된 동산(?)에 오층짜리 석탑 하나, 그게 왕궁리 유적의 전부이긴 하다. 한바퀴 쭉 돌면서 정원으로 조성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부분까지 걸어보았는데 발굴을 했으니 여기가 옛날에 그러했을 지역이었다고 가늠할 수 있는것이지, 만일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면 그냥 마을 뒤의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했다.


설명에 따르면 이 지역은 백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국사를 배울 때 백제의 역사는 위례시기 / 웅진시기 / 사비시기 이렇게 셋으로 나눠서 배우면서 수도가 지금의 서울에서 공주로, 그리고 마지막엔 부여로 옮겨졌다 정도로 익힌다. 그런데 익산 지역에 남은 채 잊혀졌던 석탑들 ㅡ 예를 들면 미륵사지 석탑이라든지 이 왕궁리 유적의 석탑이라든지 ㅡ 에 더하여 발굴이 되기 시작한 다양한 유적지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결정적으로 이 왕궁리 유적에서 '수부(首府)'라고 조각된 기왓장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이 백제 무왕(武王)시기를 전후해서 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도로 고려될 정도로 계획된 지역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왜 그 모든 건물들이 이렇게 남은 것도 없이 깡그리 사라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무왕 시기가 7세기이고, 이는 무려 1400여년 정도 전의 이야기이니 석조 건물이 아닐 바에야 한반도에 지어진 궁궐이며 사원이며 모든 목조 건축물은 대대적인 중수(重修) 없이 지금까지 살아남기는 힘든 것이 당연한 사실. 당장 경주시에 가도 신라 왕실의 건축물 중에서 석재로 만든 첨성대나 석굴암이 아니고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목조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그리고 그 때문에 최근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있지 않은가. 백제 유적 역시 그러한 이유로 오랜 시간에 걸쳐 발굴 및 복원되고 있고 익산에는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대표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데 오늘 내가 그 중 하나인 왕궁리 유적에 와 본 것이다.


유적 한가운데 서서 바라보자면 1400여년 전에 이 지역이 얼마나 융성했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왕궁리 유적 바로 옆은 고속도로, 그리고 다른 한 편은 드넓은 농지라서 아마 확장된 지역에서의 대대적인 발굴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 일본 나라(奈良)에 갔을 때 한창 복원 중이던 헤이조쿄(平城京) 궁역(宮域)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보다는 못미치더라도 지금 왕궁리 유적의 지역으로 설정된 면적보다는 넓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그저 상상 속 가늠일 뿐, 누가 알겠나. 역사의 급격한 변화, 곧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지켜본 것은 오직 돋운 땅 위에 홀로 서 있는 그 석탑 뿐이었다. 차를 몰고 왕궁면에서 삼례읍을 지나 봉동읍으로 드라이브 겸 하면서 돌아왔는데, 운전 중에 그 탑을 떠올리자면 뭔가 쓸쓸하고 처연한 마음이 들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