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미네소타 대학의 공동 기기원에 해당하는 Characterization Facility에 있는 원자간력현미경(atomic force microscope, AFM; 참고로 아무도 이 기기 이름을 한국어로 부르지 않는다.) 교육에 동참하기 위해 일종의 오픈 예비시험(!)을 쳤다. 기기 담당자는 AFM 전문가였는데, 등록된 계정을 통해 그가 학내 메일로 내게 보낸 True/False 50문항짜리 엑셀 파일을 보고 나도 모르게 기겁을 하고 말았다. 문제만 슥 봐서는 도저히 내가 알고 있는 AFM 상식으로 풀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드롭박스(dropbox)에 공유되어 있는 AFM 관련 정리 자료를 먼저 읽고 답안을 작성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pdf 파일을 열었는데, 자료 쪽수가 110쪽이 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시차 적응 때문에 졸려 미치겠는데 AFM 자료를 읽다가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겨우겨우 내용들을 꾸역꾸역 다 읽고 엑셀 파일로 돌아가서 답안을 작성하려는데... 아니 그럼에도 문제를 풀 수 없잖아!


문제 대부분은 기기를 다루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닌, 기기의 작동 원리 및 배경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서울대에서 6년이 넘는 시간동안 AFM을 신나게 다루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들이 너무나도 많이 튀어나와 굉장히 애먹었다. 게다가 나는 tapping mode만 사용했었지 contact mode는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여기와 관련된 내용은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tapping mode를 활용하면서 이게 repulsive regime인지 attractive regime인지 고려해본 적 역시 (지금 좀 부끄럽지만) 전혀 없었다. 내가 찍고자 하는 나노입자, 혹은 고분자 나노구조의 이미지가 원하는 대로 나오고, 그것이 분석 가능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아니 내가 뭐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해?' 라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며 문제를 풀다보니 '아.. 진짜 내가 뭐 하나도 모르고 그냥 사진 얻는데에만 몰두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답안을 작성한 뒤 담당자에게 돌려보냈는데, 채점 결과를 바로 보내주셨다. 50개 중 36개(72%) 맞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절반 정도 맞을 줄 알았는데 70점을 넘겨서 굉장히 의아했다.) 일단 담당자가 '너 불합격!'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금요일에 단체 교육에 참여시키겠다고 했으니 시험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긴 한데, 다시 한 번 내용을 리뷰하면서 도대체 내가 뭘 모르고 뭘 알고 있는지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사실 과학 연구에서 측정 기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하지만 그 측정 기기에 대한 이해 혹은 원리에 대한 고찰이 전체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낮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그런 세세한 내용이란 오직 그 기기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사람만이 관심을 가질만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귀찮고 복잡한 물리화학적 배경 지식은 치워둔 채 그 기기가 생산해주는 데이터에만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냥 기기 앞에 앉아서 기기가 떠먹여주는 정보만 꿀꺽 삼키는 것 같은 그런 모습? 물론 이러한 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연구자들이 자기가 다루는 모든 기기의 분석법을 자세히 다 알고자 한다면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요즘 연구소나 회사, 대학 등의 연구 기기 시설에는 기기별로 굉장히 숙련된 담당자들이 고용되어 일반 연구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일종의 연구 세계의 분업(分業)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분업의 지점이 어디까지여야 한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굉장히 애매한 것이, 요즘 연구자들이 하나의 기기만을 깊이 다루는 것도 아니기에 세세한 고급 기술들을 익히는 것이 어쩌면 시간 낭비이겠지만, 기초적인 수준에서만 분석 기기를 다루면 좀 더 고급 활용 수준에서 얻어낼 수 있는 생산성 높은 정보들을 얻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다. 한두번 생각해본 바가 아니지만 AFM 사용자 교육을 앞두고 그런 생각이 오늘 하루종일 머릿 속에 맴돌았다. 내가 이만큼 세세하게 알아서 도움이 될까? 이런 내용이 있었다니 내가 다음에 내 샘플을 찍을 때 활용하면 좀 더 좋지 않을까? AFM을 그런데 찍을 샘플을 만들 수 있기는 한 거야? 결국 포닥이 되어도 현미경 사진 얻느라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겠군? 등등등.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