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내가 외국어를 얕고 넓게 건드린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다. 원래 스페인어 DELE 시험을 끝낸 이후에 포르투갈어를 좀 보려고 책을 빌렸는데, 최근에 독일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내가 과연 지난 7년동안 많은 독일 친구들과 교제하면서 도대체 할 줄 아는 독일어가 무엇이던가 생각해보니 거의 없었다. Danke, Bitte, Scheiße 정도...?


그래서 오랜만에 들른 서점에서 '초보자를 위한 독일어 첫걸음'이라는 대단히 고전적인 형식으로 쓰여진 문법서를 한 권 샀다. 물론 옛날옛날에 '최신 독일어'라는 전혀 최신이 아닌 독일어 교본을 산 적이 있지만 그 책으로는 워낙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하루에 한 챕터씩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된 이 책을 새로 구입한 것이다. 물론 읽은지 8일째 되는 날 '이 장은 전혀 하루만에 읽고 소화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라는 낭패감이 내 몸을 온통 휘감았지만, 뭐 읽으면서 따라하다보니 그런대로 진척은 있다. 적어도 독일어의 관사인 der와 부정관사인 ein의 변화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는 그저 대단한 진일보를 이뤘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독일어 명사의 격변화를 암기하다보니 이전에 익혔던 러시아어의 격변화가 새삼 떠오르는 것이었다. 독일어는 주격(제1격, Nominativ), 소유격(제2격, Genitiv), 여격(제3격, Dativ), 그리고 목적격(제4격, Akkusativ)으로 나눠지며 성, 수를 따지면서 강변화, 연변화, 혼합변화를 외워야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 혹은 더 악랄하게 ― 러시아어는 주격(Именительный), 생격(Родительный), 여격(Дотельный), 대격(Винительный), 조격(Творительный), 전치격(Предложный)으로 나눠지며 동일하게 성, 수를 따지면서 경변화와 연변화를 외워야 한다. 물론 불규칙이 있는 것은 어느 언어나 공통.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친김에 오랜만에 러시아어 교본을 꺼내 다시한번 러시아어 명사의 변화형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나 되새겨야 할 양이 너무나도 방대해서 일단 인칭 대명사와 지시 대명사, 소유 대명사만 따져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회가 허락된다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한번쯤 독일을 방문해서 이제 막 박사과정을 마치는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그 때 웬만하면 영어가 아닌 독일어를 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 첫 해뿐 아니라 중간에도 여러번 자주 만났던 한나는 내게 독일어 사전을 선물하며 독일어 공부할 것을 독려했는데 내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한 점이 좀 미안하기도 하고. 물론 그 사전이 독-독 사전이기 때문에 단어를 모르는 것뿐 아니라 뜻풀이까지 몰라서 결국 독-한 사전을 보아야 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뭐 그런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것을 베풀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내게 많은 것을 주었던 좋은 독일 친구들이니까 내 모든 서울대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그들을 보며 독일어로 인사하면 딱 괜찮을 것 같다. 물론 관건은 시간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