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라는 말이 있다. 위키백과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지식의 저주란 어떤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도 모르게 추측하여 발생하는 인식적 편견을 의미한다. 과학을 전공한 박사학위자들 중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태도가 가끔 엿보이는데, 여기에 오만이 덧씌워지면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 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도대체 학생들이 이걸 왜 모르는 거지?', '요즘 이런 것도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니 교육이 다 엉망이구만!', '그래도 나는 젊었을 때 이건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결국 소피아(σοφία)의 저주는 오늘날 '훈장질'로 귀결된다.


그런데 오늘 지도하는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이 저주의 근원인 지식이 우리의 경험과 실천도 포함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하나의 실험을 계획하고 진행할 때 우리는 보통 과거 십수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므로, 이런 실험은 이 정도의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고, 이런 분석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료가 준비되어야 하며, 실질적인 실험을 위한 오만가지 잡일들이 내 시간을 갉아먹을 것이며, 이후 논문을 쓰려면 조지 화이트사이즈(George Whitesides) 교수가 언급한 대로 지금부터 글을 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전무하거나 짧은 학생들이나 박사후연구원이 내가 펼쳐놓은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보다 더 높다. 그렇다면 ㅡ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용례일 수 있으나 ㅡ 이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의 저주는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바로 '닦달'이다. 지도받는 사람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시공간을 설정함으로써, 내가 바라는 민코프스키(Minkowski) 공간의 위치에 결과물을 순차적으로 받아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니 이런 것도 예상 못했어?', '당연히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이런 방향을 모색해 봤어야지!', '나였으면 이렇게 해 봤을텐데 말이야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야 되겠니?'


왜 '훈장질'과 '닦달'은 서로 다른 층위의 갑질인데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꼰대질'의 느낌으로 수렴하는지 의아했었는데 오늘에야 그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결국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말한대로 아는 것(knowledge)이 힘(power)이긴 하지만, 옛 시카고의 시장 말마따나 겸손(humility)이 없는 권력(power)은 위험(dangerous)하다고 했으니, 지식을 쌓는 것에 혈안이 되었던 모든 선비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박사학위자들은 이를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