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발표 중에 간혹 들리는 말 중 '담지'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보통 어떤 대상을 표면 혹은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 촉매 입자를 어딘가에 도입시킨다고 할 때 '담지시킨다'라고 표현하는 경우

- 어떤 물질이 촉매 입자를 포함되어 있으면 '담지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

- 이렇게 '담지된' 물질을 '담지체'라고도 부르는 경우


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뜻으로 활용하는 '담지'라는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는 정체불명의 단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을까? 국립국어원이 편찬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담지'라는 표제어는 2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담지1(擔持)「명사」 『음악』 국악에서, 임금이 행차할 때 방향(方響)이나 교방고(敎坊鼓)를 메고 따르는 사람. 방향은 두 사람, 교방고는 네 사람이 멘다.


담지2(膽智)「명사」 담력과 지혜를 아울러 이르는 말.


그나마 의미가 통할 것 같은 단어는 1번 담지(擔持)인데, 담(擔) '메다'라는 뜻이고, 지(持)는 '가지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상통하는 의미를 가졌다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해괴한 단어를 폭넓게 사용하고 구사한다는 점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입말과 사전 사이의 괴리를 도저히 못 참는 나는 도대체 이 정체불명의 단어가 어떤 경로를 통해 학계에 들어왔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헀다. 바로 여기에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자(者)를 붙인 '담지자(擔持者)'라는 (더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인문학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검색 엔진에서 담지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웹문서를 찾아 잘 고찰해보니 담지자는 독일어 단어 Träger의 번역어로서 만들어진 단어인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단어는 '옮기다, 지다, 품다' 등의 뜻을 가진 독일어 동사 tragen에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접미사 -er를 붙인 ㅡ 그러면서 모음 변화가 수반된 ㅡ 단어로, 영어로는 carrier, bearer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듯 하다. 실제로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번역에서 원문 "Als bewußter Träger dieser Bewegung wird der Geldbesitzer Kapitalist."를 "이 운동의 의식적 담지자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 된다." 라는 (질낮은 번역투로) 기술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담지자는 독일어의 Träger가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는 번역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트헤가/로 발음되는 Träger는 정말 간단한 단어인데 두어 음절의 간단한 한국어 단어로 표현하기가 정말 곤란한 단어라는 것이다. -er 접미사가 붙은 단어들 중 영어로 teacher라든지 독일어로 sänger라든지 이런 단어들은 한국어 화자들이 친숙하게 사용하는 선생님, 가수 따위의 짦은 음절 단어에 잘 대응하므로 번역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별별 동사나 명사에 -er을 붙여 파생어를 만들다보니 이에 대응하는 마땅한 한국어 짧은 음절 단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번역가의 고충일 것이다. 이는 개역한글판 성경을 읽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정말 뼈저리게 느끼는 대목 중 하나인데, 예를 들어 「룻기」 4장 15절을 보면,


- And he shall be unto thee a restorer of thy life, and a nourisher of thine old age (KJV)

-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개역한글)

- 그가 당신에게 살 맛을 되돌려주고 노후를 공양해 줄 것입니다. (공동번역)


restorer나 nourisher는 각각 restore, nourish라는 동사에 접미사 -er을 붙인 것이다. 그러면 그냥 '회복시키는 사람', '기르고 키우는 사람'이라고 번역하면 되겠지만, 뭔가 딱 하나의 단어로 떨어지는 단어를 찾으려 하다보니 회복자(回復者), 봉양자(奉養者)라는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런 계열에서 내가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경우는 『위대한 유혹자』라는 드라마 제목이었다. 유혹자가 뭐야 유혹자가.) 그래서 번역가가 Träger라는 단어를 보고 '아.. 운반하는 사람? 가진 자? 부담하는 사람? 뭐 적당한 번역어가 없나?' 하고 고민하다가 선택한 단어가 불행히도 담지(擔持) + 자(者)였던 셈이다.


문제는 담지라는 단어가 tragen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예전부터 이 단어를 널리 사용해왔어야 정상인데, 정작 오랜 문헌에서 담지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를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담지'라는 단어는 번역가의 넘겨 짚기식 상상에 의해 창조된 단어라는 게 내 결론이며, 그러므로 사용을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담지라는 뜻을 별 무리 없이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여 널리 사용한 까닭이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첫 음절 '담'이 '담다'의 첫 음절과 동일하다. 은근히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소지(所持)하다, 견지(堅持)하다, 유지(維持)하다와 같이 지(持)라는 한자어를 붙였을 때 연상되는 '쥐다, 소유하다'의 의미가 잘 와닿는다.
  3. 뭔가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한자어라서 그러했다.

아무튼 한국어로 맛깔나게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더 힘든 법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